[세상사는 이야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찰스 킨들버거

그리움 한줌 2022. 7. 14. 09:35

 

평점 ★★★★

<인상적인 구절>

1970년대 초 시장의 지배적인 견해는 그 이전 수년 동안 독일과 일본에 비해 높았던 미국의 물가상승률을 반영하기 위해 미국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10~12% 정도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 개별 통화의 시장환율 변동은 국가간 물가상승률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변동폭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 예사였다.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시장 거품이 붕괴했을 때,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입은 손실은 그 자본금의 몇배에 달하는 규모였고, 거의 모든 일본 시중은행들이 법정관리 상태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 멕시코를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들의 통화가치가 급락하자 이들 나라의 시중은행은 대규모 대출손실과 국내 차입자의 외화평가손실로 인해 대다수가 파산했다. 1990년대 초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부동산과 주식시장 거품이 붕괴했을 때도 이들 나라의 거의 모든 은행들이 파산했다.

멕시코 시중은행의 거의 전부가 페소화가 급락하던 1994년말 파산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상당수 시중은행들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파산했다.

이들 금융위기와 은행 파산 사태는 자산가격 거품의 붕괴 혹은 외환시장에서의 통화가치 급락에 따른 결과였다.

이런 은행위기의 비용은 여러가지 잣대로 볼때, 즉 은행이 입은 손실을 해당 국가의 국내 총생산(GDP)이나 정부지출의 비율로 계산해볼때, 또 그 결과로 나타난 경제성장률의 둔화를 고려해 볼 때 실로 막대한 수준이다. 도쿄와 오사카에 본부를 둔 은행들의 손실(이것은 결국 일본 납세자의 부담이다)은 일본 GDP의 25%를 넘어서는 규모였다. 아르헨티나 은행들의 손실은 GDP의 50%에 달했다.

은행의 파산, 큰 폭의 환율 변동, 자산가격의 거품은 서로 체계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경제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

1970년대는 가속적인 물가상승의 시대로 전시를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소비자물가가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한 시기였다. 1970년대 말의 지배적인 견해는 미국과 세계의 인플레이션이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때의 속설은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쿄와 오사카에 본부를 둔 은행들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가 본거지인 은행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예금과 대출, 자본금을 확대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10대 은행 중 7~8개를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차지했다. 1990년대 초 일본의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무너졌다.

노르딕 3개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은 거의 동시에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을 재연했다. 금융자유화를 동반한 1980년대 후반의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세에 이어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폭락, 그리고 은행의 파산이 뒤따랐다.

멕시코가 향후 미국과 캐나다 시장에 자동차 및 세탁기 그 밖의 다수 제조업 제품을 공급하는 저임금, 저비용 생산기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보편적인 전망이었다. 해외 저축자금의 대규모 유입으로 페소화의 실질 외환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멕시코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GDP의 7% 수준까지 늘어났다. 대외채무는 GDP의 60%에 달했고, 멕시코는 늘어나는 대외채무 이자를 갑기 위한 자금을 새로 유입되는 신규 투자자금으로 확보했다.

1990년대 중반 태국 방콕,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급등했다.

미국 기업들이 북미 시장의 공급기지로 멕시코에 투자했을 때와 똑같이, 일본 기업과 유럽 및 미국 기업들은 저임금, 저비용 생산기지로 이들 나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일본 및 유럽 은행들은 이들 나라에 대한 대출을 급속히 확대했다. 그동안 태국의 국내 대여자들은 국내 차입자들의 채무이자 상환의지를 평가하는 작업에서 충분한 차별화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96년 하반기부터 태국의 국내 대여자들은 대규모 대출손실을 입게 됐다.

해외 대여자들은 태국의 유가증권 매입을 급격히 축소했고, 30개월 전 멕시코 은행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태국은행은 외환시장에서 자국통화 가치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 1997년 7월 초 태국 바트화의 외환가치 폭락은 여타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자본 유출을 야기했도, 이 지역 통화의 외환가치는 30%이상 폭락했다.

인도네시아 루피화는 외환시장에서 80%의 가치를 상실했다. 이 지역 대다수의 은행들은 그 어떤 시장가치 평가 기준으로 검증했더라도 파산했을 것이다. 이 위기가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번져 루블화 대란이 벌어졌고, 1998년 여름 러시아의 은행 시스템이 붕괴했다.

1990년 나스닥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의 시가총액은 뉴욕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11%였다. 이 수치는 1995년과 2000년에 각각 19%와 42%로 늘어났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주가에 형성된 거품은 미국의 눈부신 경제호황과 함께 나타났다.

자금 유입의 증가에 따라 이들 나라의 통화가치가 상승했고, 또 이들 나라의 투자 가능한 부동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이 상승했다.

해외로부터 어느 나라로 자금 유입이 증가하면 거의 예외 없이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에서 거래되는 유가증권의 가격이 상승했다.

금융위기를 다루는 서적의 생산량은 경기순환 파동과 반대로 움직인다. 1920년대말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 그에 뒤따른 주식시장의 붕괴와 대공황을 겪는 동안 금융위기에 대한 엄청난 양의 책이 쏟아졌다.

이 책의 초판은 미국 주식시장의 15년 강세장이 끝나고, 주가가 50%나 하락한 1973~1974년이 지난 시점인 1978년에 출간됐다.

이 같은 광기 현상은 극적이지만, 미국 주식시장의 200년 역사상 광기 국면은 단지 두번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광기 현상은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광기 현상은 경기순환의 확장 국면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광기에 동반하는 풍요로운 감정이 지출 증대를 야기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광기, 특히 거시적 차원의 광기는 경제적 풍요감과 함께 나타난다. 더 많은 기업들이 희망에 휩싸여 기대에 부풀고, 신용이 넘쳐나므로 투자지출은 급증한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도쿄와 오사카의 안면이 있는 은행가들에게서 원하는 만큼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돈이 공짜인 것처럼 보였고, 일본인들은 흥겨운 소비 잔치와 투자 잔치를 계속했다. 일본인들은 수만점의 프랑스 예술작품을 구입했다.

반 고흐의 작품 의사 가셰의 초상화를 매입한 오사카 출신의 경마장 사업가는 당시 미술품 가격으로는 사상 최고가인 9000만 달러를 지불했다. 미쓰이 부동산은 최초 호가가 3억 1000만 달러였던 뉴욕의 엑손 빌딩을 구입하는 데 6억 2500만 달러를 지불해, 업무용 빌딩 매입가격으로는 당시 최고 가격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IT산업과 생명공학 분야의 신생 기업 창업자들은 그들 회사의 주식이 주식시장에 상장되기만 하면 큰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던 벤처 자본가들로부터 거의 무한대의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이런 풍요감에 들뜬 기간에는 자산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데 기초한 투자소득보다는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에서 발생하는 단기 자본 이득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어서 하나의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정책의 변화나 어제까지만 해도 성공적이라고 여겨지던 회사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파산하는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자산가격은 상승 행진을 중단한다. 자산의 매입을 대부분 차입금으로 조달했던 일군의 투자자들은 결국 대출자금에 대한 이자 지불액이 자산에서 나오는 투자소득보다 커지게 되는 순간,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이나 주식의 투매자로 돌변한다.

여러 해에 걸쳐 거품과 유사한 행태를 보여주는 나라의 경제적 상황은 자전거를 타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유사하다. 평형을 유지하려면 앞으로 내달리는 동력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는 금방 넘어져 버린다. 광기 국면에서 자산가격이 상승을 멈추면, 곧바로 하락이 시작된다. 평평한 고지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이들 자산을 팔아치우려는 매도 대열이 자기실현 능력을 지닌 예언처럼 시장을 장악하고, 또한 급작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패닉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 주택, 건물, 토지, 주식, 채권 등의 시장가격이 고점 대비 30~40% 수준까지 무너진다. 파산이 급증하며,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실업이 늘어난다.

이 책의 논제는 광기와 패닉의 순환이, 경기순환 파동과 함께 오르내리는 신용 공급의 변동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광기는 현재 및 가까운 미래 시점의 부동산 가격, 주가, 상품가격, 혹은 특정 국가의 통화가치가 먼 미래 시점에서의 동일한 부동산 가격이나 주가, 상품가격, 통화가치와 일관되지 않을 정도로 상승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원유가격은 1970년대 초 배럴 당 2.5달러에서 상승하기 시작해 1970년대 말 36달러까지 올랐는데, 배럴 당 8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유가 상승 초기의 예측은 광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경기 확장기에는 투자자들의 낙관적인 태도가 증폭되고, 이들은 먼 미래 시점에 얻게 될 수익 기회를 더욱 열광적으로 찾아다닌다. 반면 대여자들의 위험회피 성향은 줄어든다. 합리적 활력은 비이성적 과열로 변이를 일으키고, 경제적 풍요감이 확대되면서 투자지출과 소비지출이 늘어난다.

전체 자산 거래 가운데 단기적인 자본이득을 노리고 자산을 매입하는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신용으로 조달한 자금으로 이렇게 자산을 매입하는 비중 또한 이례적일 정도로 높아진다.

거품이라는 용어는 경기순환의 광기 국면에서 자산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범주적 용어다.

연쇄편지, 피라미드 조직, 폰지금융, 거품, 광기는 어느 정도 중첩된 함의를 갖는 용어들이다. 범주적 용어로는, 먼 미래 시점의 자산가격과 부합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의 자산가격이 괴리되어 있다는 뜻에서, 지속 불가능한 유형의 자금조달 행태가 적합하다. 폰지금융은 일반적으로 한달치 이자로 30%, 40% 혹은 50%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동원한다.

거품은 보통 부동산이나 유가증권 같은 특정 자신을 해당 자산의 투자소득에서 발생하는 수익률 때문이 아니라, 그 자산이나 증권을 다른 누군가에게 더 높은 가격에 매도할 수 있다는 기대에 따라 매입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개인들은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매수하려고 안달이 난다.

거의 모든 광기는 탄탄한 경기 확장 국면을 동반하지만, 소수의 경기 확장 국면만이 광기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기와 경기 확장의 동반 관계는 계속 탐구할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자주 발생하며, 충분히 정형화된 모습을 띠고 출현한다.

규모가 큰 나라들 거의 모두가 유동성 부족이 채무상환 불능의 위기로 번지게 될 개연성을 출이기 위해 국내의 궁극적 대여자로 중앙은행을 설립해놓고 있다.

자산가격이 곤두박질치듯 떨어질 때는 유동성 수요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다수의 개인과 기업이 파산한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벌어지는 자산의 매도사태는 자산가격의 연속적인 하락을 유발한다. 이럴 때 궁극적 대여자가 금융시장의 안정을 방어하거나 금융 불안정을 완화시킬 수 있다. 여기서 딜레마는, 자산가격이 급락하더라도 정부가 관대한 구제책과 함께 조만간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투자자들이 미리 알고 있다면, 자산과 유가증권을 매입하는 투자자들의 조심성이 줄어들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붕괴가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패닉과 붕괴에 대처하는 궁극적 대여자의 역할은 애매함과 딜레마에 싸여 있다.

앞서의 저서 대공황의 세계 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에서 내린 결론은 1930년대의 불황이 광범위하고 혹독하게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는 국제적인 궁극적 대여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광기와 패닉의 화폐적 측면들은 매우 중요하며, 이 책의 여러 장에서 자세하게 점검했다. 통화주의적(Monetarist) 시각 - 적어도 통화주의자들 가운데 하나의 시각 - 은 통화 공급량의 증가율이 안정적이거나 일정하다면 광기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수의 광기 국면이 급속한 신용의 확대에 동반해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광기 국면도 있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주가 상승률은 통화 공급량의 증가율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았고, 마찬가지로 1990년대 후반 나스닥 시장의 주가 상승률도 통화 공급량 증가율보다 훨씬 더 높았다.

위기 진행과정의 초기나 말기에 본원통화량이 변동하는 금융위기와 통화 공급량이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 금융위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당연한 구분이다.

한가지 문제는 광기가 공식적 경고 - 도의적 권고나 설득 - 에 의해 중지될 수 있을것인가라는 점이다. 경험적 증거가 말해주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는 광기를 멈출 수 없으며, 위기를 막고자 의도했던 경고 후에 많은 위기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널리 지적되는 사례는 미국 주식시장이 비이성적일 정도로 과열되있다고 지적한 열런 그린스펀이 당시 FRB의장의 1996년 12월 6일자 논평이었다. 이때 다우존스 산업평균 주가는 6600이었으나 그 후 계속 상승해 1만 1700까지 치솟았다. 나스닥 지수는 그린스펀의 논평 시점에 1300이었는데 4년 후 5000이상으로 뛰어 올랐다.

한 시장의 호황이 다른 시장으로 확산되는 것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텍사스 주 휴스턴의 주택 호황은 다른 옷으로 가장한 석유 호황이다. 따라서 두가지 이상의 자신이 투기 대상인 경우, 금융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어느 한 상품의 가격 상승은 소비자들이 추후 가격 하락을 예상할 경우에는 구입을 미루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구입을 재촉하게 할 수도 있다.

붕괴와 패닉은 광기의 기간 중에 있었던 모종의 불법, 부정행위, 공직자의 부정부패 등이 드러나면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기록에서 추론해 볼때, 사기 행태는 호황이 부채질한 부에 대한 탐욕스러운 식욕이 야기하는 반응이다.

엔론은 1990년대 호황기의 표지인물급 존재였다.

MCI월드컴은 가장 고속으로 성장하던 통신업체 가운데 하나였다.

시장은 합리적이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불간섭 접근을 선호한다.

1990년에 일본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은행과 신용조합을 비롯한 각종 금융기관들이 벌여 놓은 온갖 종류의 부실 부동산 대출이 표면화되면서 납세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전가해야 하는가라는 신경질환성 문제에 직면한 일본 정부로서는 이 문제가 매우 민감한 현안이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위기 대처 방안의 결정이 더디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더욱 느렸던, 전신마비 증세에 빠진 일본 정부의 상태였다.

금융질서는 자산가격 붕괴에 따르는 패닉의 확산을 막기 위해 궁극적 대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궁극적 대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채무 과다 상태에 빠지게 될 개별 차입자들이 구제될 것이라는 견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역사가들에게는 각각의 사건이 고유하다. 경제학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축적된 데이터에는 유형이 존재하고, 개별적인 사건들은 유사한 반응을 유발한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역사는 개별적인 반면, 경제학은 일반적이다. 경기순환은 시장경제의 표준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거시경제학은 장기적인 추세 성장률을 중심으로 국민소득 성장률이 오르내리는 순환적 변동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민스키는 경기가 확장할 때 늘어났다가 경기 둔화 국면에서 줄어들면서, 경기순환의 파동과 함께 오르내리는 신용 공급의 순환에 주목했다.

민스키는 이처럼 호경기때 늘어나고 경제의 탄력이 약화될 때 줄어들면서 경기순환에 동조하는 신용 공급의 확대와 축소가 금융 질서의 취약성을 초래하고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고 믿었다.

이 모델은 신용 공급의 불안정성에 주목한 존 스튜어트 밀, 알프레드 마샬, 넛 빅셀, 어빙 피셔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의 충격은 전국적인 전력 보급과 전화를 보유한 가정의 급속한 확산, 자동차 생산의 급증 및 이에 동반한 고속도ㄹ의 건설이었다.

1990년대 미국에서의 충격은 정보기술 혁명과 컴퓨터, 무선통신, 전자우편을 통한 새롭고 값싼 방식의 통신 및 제어기술이었다.

1990년대 초 미국의 기업이익은 GDP의 3%였는데, 1990년대 말에는 10%로 높아졌다.

민스키 모델에서 호황 국면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신용의 팽창이다. 은행 산업이 자리잡기 이전인 17세기와 18세기에는 개인 신용과 판매자 금융이 투기적 확장 국면에 연료를 공급했다. 은행이 만들어지자 이들이 신용의 공급과 함께 그들 자신의 부채를 확대했다.

민스키는 은행 여신의 성장이 매우 불안정한 양상을 띠며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자금 대여자로서 어떤 때는 무척이나 강한 풍요감에 젖어 제한 없이 자금을 빌려주었다가, 어떤 때는 신중함이 극에 달해 차입자들이 바람에 휘둘리도록 내버려뒀다. 중요한 정책 현안 가운에 다하는 은행 및 다른 신용 공급자들의 여신을 통제하는 문제다.

민스키는 개별 차입자들의 영업이익과 채무 원리금 상환 사이의 관계를 기준으로 세가지 자금조달 유형을 구분했는데, 헤지금융, 투기금융, 폰지금융이다. 어느 기업의 예상 영업이익이 이자와 채무 원금의 분할 상환액을 지불하고도 남을만큼 충분할 경우, 이 기업은 헤지금융 집단에 속한다. 예상 영업이익이 이자를 지불할수 있을만큼은 충분하지만, 만기 시점까지 잔여 채무 원리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상환하려면 신규 차입을 해야 하는 경우, 투기금융 집단에 속한다. 예상 영업이익이 약정된 지급 일정에 따른 이자를 지불하기에도 부족할 개연성이 크다면, 이 기업은 폰지금융 집단에 속한다. 폰지금융 집단에 속하는 기업은 (채무 원금은 차치하고) 이자 상환을 위한 현금을 마련하려면, 추가 차입으로 채무 원금을 늘리거나 보유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민스키의 가설은 경제가 둔화하면, 헤지금융으로 운용되던 기업들 가운데 일부가 이 그룹에서 탈락해 투기금융 집단으로 떨어지고, 이전에 투기금융으로 운영되던 기업들 가운데 일부가 폰지금융 집단으로 선로를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이어질 경우 나타나는 결과는 아담 스미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과잉거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용어는 그 정확성이 다소 떨어져서, 자산가격이나 상품가격이 오를것이라는 투기적 판단, 장래 수익의 과대 추정, 혹은 과도한 차입금 의존 거래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유가증권의 경우에도, 유가증권이라는 상품에서 발생하는 투자소득이 아니라, 다시 매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수하면 투기의 대상이 된다.

1990년대 말 월 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은 미국의 기업이익이 향후 5년동안 연 15%의 속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른 사람들이 투기적 매입으로 이익을 얻는 것을 기업과 개인이 지켜보면서 선행자 따라하기 과정이 나타난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친구 이외의 다른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속편한 일일 것이다. 은행들도 마찬가지로 보다 빠른 속도로 대출을 확대하는 다른 대여자들에게 시장점유율을 빼앗기기를 싫어한다. 이들은 다양한 차입자 집단에게 대출을 늘리게 된다. 예전에는 투기적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던 기업과 개인들 중에서도 높은 수익률을 얻기 위한 소란스런 게임에 뛰어들기 시작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진다. 돈을 버는 일이 이보다 더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본이득을 위한 투기는 사람들을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에서 일탈시켜 광기나 거품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묘사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이끈다.

경제학자들은 어떤 자산이나 유가증권 혹은 상품의 가격이 펀더멘털을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경우의 괴리를 표현하기 위해 거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펀더멘털에 준하는 작은 가격 변동을 가리킬 때는 잡음(noise)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20세기중에 나타났던 대부분의 광기와 거품은 부동산과 주식에 집중됐다. 1920년대 중반 플로리다 주 남동부의 토지를 대상으로 한 광기가 있었고, 1920년대 후반기에는 전례 없는 미국의 주식 거품이 발생했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부동산의 투기적 매입이 주식시장의 호황을 유발했다. 이와 유사하게 1990년대 아시아 국가들의 거품은 부동산과 주식 모두에서 발생했는데, 일반적으로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주가의 상승을 견인했다. 1990년대 말 실리콘 밸리와 몇몇 지역에서 가계 자산의 증가가 부동산가격의 급등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미국의 거품은 주로 주식에서 형성됐다.

1980년대 일본의 거품은 한국, 대만, 하와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과 대만은 당시 일본의 공급망을 구성하는 한 고리였으므로, 일본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그 공급 고리의 사정도 좋아진다.

도쿄와 하와이의 관계는 뉴욕과 마이애미의 관계와 유사하다. 일본인들은 따뜻한 햇볕이 함께 하는 휴가와 여가를 즐기기 위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다. 하와이는 일본인들이 별장과 골프장, 호텔을 구입하면서 1980년대에 부동산 호황을 경험한 바 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충격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전달 경로 가운데 하나는 한 나라에서 발생한 어떤 상품가격의 변화가 다른 나라에서 이와 거의 동일한 상품가격에 대등한 변화를 유발하는 차익거래다.

어느 나라에서 유가증권의 수출, 즉 외국인 투자자의 유가증권 매입이 늘어나면 이 유가증권 가격의 상승과 함께 외환시장에서 이 국가의 통화가치도 함께 상승하게 된다.

이상적인 교과서의 세계에서는, 금의 유입에 따라 금화의 유통 물량이 한 나라에서 증가하면 다른 나라에서 이에 상응하는 금의 공급 감소가 발생하고, 첫번째 나라의 통화 공급량 증가와 신용 팽창은 두번째 나라의 통화 공급량 감소와 신용 위축에 의해 상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두번째 나라의 투자자들이 해외의 물가 상승과 이에 동반하는 이익 증가에 대응해 자국의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이 자산들을 매수하기 위해 신용 수요를 확대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첫번째 나라의 신용 팽창이 두번째 나라의 신용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두번째 나라에서 발생한 본원통화의 축소가 신용 총량의 위축 요인으로 작용한다 해도, 투기적 동기의 확대와 함께 신용 수요가 늘어나면 본원통화의 축소 효과를 상쇄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압도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1928년 당시 뉴욕증권거래소의 상장 주식 시가총액은 연 36%나 증가했고, 1929년의 첫 8개월 동안에는 53% 증가했다.

1998년에도 나스닥시장의 상장 주식 시가총액은 연 42% 증가했고, 그 후 15개월 동안에는 연 101%의 속도로 증가했다.

자산가격이 급락해 자산 매입을 위해 빌린 차입금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면 차입금 의존도가 높은 일부 투자자들이 파산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1990년대 내내 일본의 주가는 하락 추세였지만, 이 기간 동안 주가가 직전 저점보다 20% 넘게 상승하는 약세장 랠리가 여섯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 때마다 주가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왔다고 판단한 일부 투자자들은 남들보다 먼저 주식을 사려고 나섰다.

위기를 격발하는 특수한 신호로서 은행이나 기업의 파산, 부정직한 수단을 통해 곤란에서 벗어나려 했던 어느 투자자의 사기나 횡령, 혹은 상품가격이나 주가의 가파른 하락이 등장할 수 있다.

과잉거래, 급반전, 신용경색 이라는 용어들은 골동품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투자자들의 낙관론이 퇴색하는 과정을 시각적 도표처럼 잘 전달해준다.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의 각국 통화가치의 변동은 장기균형 가치에 비해 큰 폭으로 출렁거렸다.

1980년대 기간 중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0배 상승했고, 주가는 지수마다 차이는 있지만 6~7배 상승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전후 최고의 경기붐을 만끽했다. 부동산 투자자들이 벌어들인 수익률은 대략 연 30%에 달했다. 기업들은 부동산 투자수익률이 철강이나 자동차, 혹은 TV 제조에서 얻는 수익률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자 은행 차입금을 이용한 거액의 부동산 투자자로 변신했다. 부동산가격은 임대료보다 몇배나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 이르자 순 임대소득이 부동산 매입에 동원된 차입금의 이자 지급액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차입자들이 네거티브 캐리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제 차입자들이 이자를 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보유중인 부동산의 일부를 담보로 차입금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일본은행의 신임총재는 부동산 담보 대출이 은행의 대출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규제함으로써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제한했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연 30%에서 5~6%로 줄어들자, 차입금에 대한 이자 지급을 위해 신규 대출이 필요했던 기업과 투자자들 가운데 일부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됐다. 이들이 부동산을 매도하면서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이 처해 있는 국제금융상의 위치는 1970년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유사하다. 당시 이들 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지속 불가능할 정도였고, 해외 채권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이자를 다시 해외 채권자들에게서 빌려서 갚았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미국의 국제수지 상태가 이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이론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경제이론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이 합리성 가정은 투기적 광기와는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서로 배치되는 두 견해는 조율돼야 한다.

경제모델에서 사용되는 합리적 기대 가정은 투자자들이 미래를 투시하는 천리안의 소유자이거나 영화 슈퍼맨에 나오는 크립톤 행성인들처럼 영안을 갖고 있어서, 경제변수의 변동이 가지는 장기적 함축을 항상 완벽하게 인식하고 제반 경제변수의 변동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보는 가격에 반영돼 있다는 속설은 어느 시장에서든 가격은 갖가지 뉴스에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대응해 형성되기 때문에, 탁자에 남는 공돈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합리적 기대 가정과 일정 변수들의 미래 값은 최근 시기의 값들을 연장한 것이라는 적응 기대 가정을 대비해 보라. 이때의 속설은 추세는 당신의 친구라는 것으로, 가격이 최근에 상승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시각을 반영한다. 반면 합리적 기대 시각의 요점은 다음주나 다음달 가격에 대한 예상이 오늘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으로 미래 시점으로투터 현재를 되돌아보는 시각이다. 즉, 오늘 현물시장에서 형성된 금의 가격은 먼 미래 시점의 금값 예상치를 보통 무위험 국채 금리로 대변되는 적절한 금리로 할인해 산출한 현재가치다.

만약 정부가 소비지출이나 투자지출을 자극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할 경우, 합리적 기대 관점의 결론은 이 정책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율 인하로 인한 오늘의 재정적자 확대가 미래 소득에 대한 세율 인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점을 투자자들이 즉각 인식하고, 다가올 납세 청구액의 증가에 대비해 저축을 늘릴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성이란 결국 세계가 실제로 작동했던 방식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세계가 따라야 하는 작동 방식에 대한 선험적인 가정이다. 투자자들이 장기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가정은 유용한 가설이다. 왜냐하면 시장의 가격 변동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밀튼 프리드만은 이에 대해 균형점에서 이탈시키는 교란적 투기는 외환시장에서 생길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어느 투자자라도 가격이 오를 때 매수하고 가격이 떨어질 때 매도한다면 결국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꼴이 되므로, 그들은 지속적 손실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당하든가 아니면 전략을 수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1866년 5월의 검은 금요일에 붕괴된 런던의 금융회사 오버렌드, 거니의 주역들은 영리한 바보들로 일컬어졌다. 이들이 손실을 야기한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방식은 어린아이가 런던 금융가에 돈을 빌려줘도 그보다는 더 낫게 빌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무모한 거래의 폐해는 언제나 그 당사자들을 넘어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신뢰는 무지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불신은 무지와 난폭함으로 이루어졌다.

투기적 광기는 경우에 따라 전반적인 비합리성, 즉 군중심리를 동반한다.

세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경우는 단순한 트레이더와 투자자, 투기자 각각이 속한 집단의 합리성이 서로 다르고, 자산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이들 집단 가운데 히스테리에 굴복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투자자와 개인이 잘못된 모델을 선택하거나, 결정적인 정보 한가지를 빠뜨리거나, 그들 마음속에 암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델과 합치되지 않는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면서 나타나는 비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다.

군중심리나 히스테리는 종종 발생하는 합리적 행동으로부터 일탈현상으로서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찰스 맥케이는 남해회사 거품을 거론하면서, 1720년 8월 남해회사의 제3차 주식 청약 당시 어느 은행가가 500파운드라는 거액의 주식을 매입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미쳤다면 어느 정도는 우리도 그들을 흉내내야 한다고 말한 사례를 언급했다.

민스키의 이론 틀에서 이런 낙관론의 파동은 경제 시스템 안의 무언가 구조적인 요인에 가해지는 충격, 즉 투자자와 기업, 대여자로서의 은행 사이에 낙관론을 증폭시키는 작용을 하는 변위요인으로 시작된다.

1970년대의 10년간은 직선적인 상승은 아니지만 가속적인 물가상승을 경험한 시기였다.

1970년대 말의 어느 단계에 이르자, 금의 시장가격은 값이 오르기 때문에 상승세를 이어갔다. 투자자들은 월요일과 화요일 간의 가격 상승을 연장해 금요일의 금값을 예측하고는, 금요일에 더 높은 가격으로 매도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과 함께 수요일에 금을 매수했다. 금을 매수한 투자자들 가운데 일부는 가격 상승을 거품으로 인식했을지 모르지만, 더 대단한 바보 이론이 작동했을 것이므로 거품이 붕괴되기 전에는 자신들이 매수한 금을 더 높은 가격에 팔아 이익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이 같은 들뜬 분위기의 경기 상승에 대해 대안적 관점의 설명을 제시한 민스키 이전의 두 사람은 실질금리의 지나친 하락을 강조했던 이벙피셔와 넛 빅셀이다. 경제 확장기에는 소비자물가와 금리 모두 상승하지만, 금리는 물가상승률보다 완만한 속도로 상승하기 때문에 실질금리는 하락한다.

낮은 가격은 과잉 수요를 야기할 수도 있다.

투기는 보통 두 단계로 전개된다. 들뜨지 않은 첫번째 단계에서는 가계와 기업, 투자자들은 충격에 대해 절제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면, 자본이득에 대한 예상이 이들의 거래를 좌우하는 지배력이 갈수록 증폭된다.

1830년대 미국에서 투자자들은 처음에는 고가의 면화를 경작하기 위한 농지를 확대하기 위해 땅을 매입했다. 그 후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땅을 되팔아 실현할 수 있는 예상 자본이득 때문에 땅을 샀다. 1850년대에 농민과 농장경영주 둘 다 처음에는 토지를 소비하다가, 곧이어 토지에 투기했다. 이들은 평소 농지 면적당 수확량 가치의 하락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이 경작할 면적보다 좀 더 넓은 토지를 매입했다.

1830년대 영국에서의 철도 사업 팽창도 두 단계로 전개됐다. 1835년 이전의 첫 단계에서 철도 건설 프로젝트들은 거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1835년 이후 두번째 단계에서는 거품으로 변질됐다.

187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의 건물 부지에 대해서도 똑같은 국면 전환이 나타났다. 이 건물 부지들은 처음에는 건축 목적으로 매입되었지만, 나중에는 자본이득을 되팔려는 목적으로 포커판의 칩처럼 매매됐다.

대여자들은 이 과정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게임의 끝내기 여건을 평가하지 못했다. 즉, 대여자들이 차입자들에게 신규 대출 형태의 현금 공급을 중단할 경우 차입자들이 이자 지급을 위한 현금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남부의 신축 미마감 주택 시장은 2순위 부동산저당증서가 활발히 거래되는 유통시장 덕택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팔릴 때마다 가격 상승을 이어가다가 1982년 절정에 도달할 후, 40%의 가격 폭락과 함께 붕괴했다. 1985년과 1986년에는 보스턴에 콘도미니엄 열풍이 불었다. 매수자들의 60%가 매입 물건을 다시 팔 목적이었는데, 1881년 시카고의 플랫형 주택 열풍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콘도미니엄 시장은 1988년에 갑자기 냉각됐다. 유사한 호황과 급락이 2003년 시카고 아파트 시장에서 일어났다.

고점에서 매수해 저점에서 매도하는 비전문가인 외부자들은 뒤늦게 그들을 끌어들이는 풍요감의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돈을 잃고 난 뒤 앞으로 5~10년 후에 쓸 또 다른 판돈을 저축하기 위해 다시 일상의 직업으로 돌아간다.

이 보일러샵의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사기 수법은 항상 똑같았다. 이들은 친구들을 활용해 여러 종목의 주가를 크게 올린다. 일단 주가가 상승 곡선을 그리면, 미국 전역의 소도시에 있는 치과의사와 장의사들에게 이 주식들을 팔기 위한 전화 마케팅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수익을 - 장부상으로 - 올렸느냐며 즐거워하는 귀 얇은 투자자들에게 해당 주식의 대부분을 팔아 넘길 때까지, 매일같이 주가 상승을 관리한다.

균형점 이탈 유형의 교란적 투기에 가담해 고점에 사서 저점에 팔았던 외부자 사례를 하나 더 찾는다면, 왕립조폐국 장관이자 위대한 과학자였던 아이작 뉴턴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1720년 봄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 뉴턴은 그해 4월 20일 보유하고 있던 남해회사 주식을 매각해 수익률 100%에 달하는 7000파운드의 이익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 뒤 그해 봄과 여름에 세상을 휘몰아친 광기에 그도 같이 휩쓸려 더 많은 물량의 주셕을 거의 최고점에서 매입해 2만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재정 파탄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태에 마음이 상한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남은 생애 내내 남해라는 이름을 듣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 했다.

진정한 자본가치 이상의 추가적인 상승을 바라는 것은 그저 공상일 뿐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한 것을 그 어떤 세속적 산술로 잡아 늘린다 해도 3.5를 만들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의제적 가치는 머지 않아 누군가에게 손실일 수밖에 없다.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을 잡아먹는 법이다. 재주껏 도망쳐라. 맨 뒷사람이 개에 물린다. 이런 말들이 패닉에 대한 처방들이다. 이와 비슷한 광경은 사람들이 들어찬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고 고함칠 때의 모습이다.

변위요인은 상황의 변화와 지평의 확장, 기대의 변경을 일이키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평소 합리적으로 기대하던 투자자들이 막상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대응이 발휘하는 힘을 인식하는 데는 실패한다.

물리학자나 수학자 혹은 교사가 부족하다고 알려지면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그들이 학위를 마칠 때쯤이면 이 분야에 취업하기 위해 훈련 받은 개인들의 과잉 공급이 발생할 수 있다. 공급이 뒤늦게 급증함에 따라 취업 기회가 갑자기 귀해진다. 그러나 과잉 공급은 학교에서의 훈련 기간이 끝난 후에야 할려진다. 커피, 설탕, 면화 또는 다른 상품의 부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과잉이 나타날 수 있다. 공급 부족 초기에는 수요의 급증으로 인해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지만, 그 후 오랜 동안의 투자 기간이 지나고 신규 공급 물량이 들어올 때는 더욱 가파른 양상으로 가격이 떨어진다.

상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품이 시장에 나올 시점에 다른 상인들이 들고 나올 물량을 알지 못했다.

1849년 금광이 발견된 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횡행하던 캘리포니아의 장래성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엄청난 기대가 당시 미국의 위기로 초래된 재앙을 증폭시키고 확산시켰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샌프란시스코로 선적되는 출하물량과 관련해 런던과 보스턴에서 여러 차례 지적된 내용은, 한 달에 보통 크기 혹은 혼합 규격의 화물선으로 6척 혹은 많아야 8척이 필요한 물량이고, 그 정도가 소비될 수 있는 물량의 전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동부 지역의 화주들은 한 달에 최대 적재량을 가득채운 대형 선박 12~15척 분량을 보냈다.

1826년에서 1832년 사이 프랑스에서는, 정직하게 벌지 않은 돈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투기가 만연했다. 지주들은 소유 자산에 대해 2.25~3.75%의 이익을 얻었고, 산업자본가들은 그들의 고정 투자에 대해 장기금리 수준보다 2~4% 높은 7~9%의 이익을 얻고자 노력했다. 원자재를 거래하는 상인과 투기자들은 20~25%의 투자수익률을 노렸다.

찰스 윌슨은 일찍이 상인에서 은행가로 업종을 전환한 네델란드인들은 암스테르담의 금리가 2.5~3%로 떨어졌기 때문에 투기습성을 기르게 됐다고 언급했다.

폰지는 한 사람의 시야가 어느 하나의 사물에 고정돼 있을 때 그 역시 눈먼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순전히 비이성적인 사례 하나는 사회가 현재의 경제 여건에 대한 제한적 타당성밖에 없는 현상적 사건에 모든 희망을 걸면서 매달리는 경우고, 또 다른 사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증거를 사회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경우다.

모순되게 나타나는 증거를 무시하는 억압의 사례, 즉 인지 부조화의 경우로서, 그는 심지어 독일 재무장관인 샤흐트조차 이 위험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암시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억압되는 현상은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라고 부언했다.

변위요인은 전망과 기대, 예상되는 수익 기회, 행동을 변화시키는 외부적 사건이나 충격으로서 자주 기대할 수 없는 모종의 돌발적인 통지다. 이런 충격이 경제 전망에 영향을 미치려면 충분히 커야 한다. 하루하루의 사건들은 전망에 일말의 변화를 가져오지만, 변위요인으로 작용할 만큼 그 영향이 큰 것은 많지 않다. 전쟁은 주된 변위요인이다.

어떤 증권 발행이 예상을 뒤엎고 큰 배수의 초과쳥약과 함께, 단기간에 청약자들에게 프리미엄을 안겨주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 차입자와 대여자, 그리고 특히 투자은행업자를 유인하게 된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투기 바람이 한창일때, 크레디탄슈탈트의 공모 주식에는 43배수나 초과 청약했고, 사람들은 밤새 줄을 서 기다린 다음에야 청약했다.

금융기관의 규제 완화는 1980년대, 특히 그 후반에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을 초래한 주된 요인이었다.

1920년대의 기술혁명 - 자동차 생산의 급증, 미국 대부분 지역의 전기보급, 전화망의 급팽창, 영화상영 극장의 증가, 라디오 방송의 시작 - 은 중요한 충격이었다. 투자가 급증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특히 그후반에 중요한 정보기술(IT) 혁명이 전개됐다. 주로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에 포진한 벤처자본가들은 IT 분야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다수의 엔지니어들에게 자금을 조달해주는 열정적인 금융 공급자였다.

거래 개시일의 주가 뻥튀기는 주가가 오르기만 할 것이라는 일종의 광고였다.

이런 주가 뻥튀기는 더욱 더 많은 신규 주식의 공모를 부추겼다.

장기적으로 주가의 수준은 세가지 요인을 반영한다.

GDP 성장률, GDP에서 차지하는 기업이익의 비중, 기업 순이익과 주가의 관계

20세기 후반 수십년 동안 투자자들은 주로 부동산과 주식에 투기했는데, 예전에는 투기의 대상이 보다 다양했다.

다양한 충격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비교적 작은 비중의 충격만 투기적 광기를 야기한다.

1720년 남해회사 거품과 미시시피 거품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고 높은 수위의 투기 바람을 뒷받침해 준 두 나라에서의 통화 팽창에 의해 달아올랐다.

이 시기에 등장한 모험적 사업들 가운데 다수가 사기였다.

남해회사 주가가 최고가에 근접할 즈음 주식을 매도해 현금흘 챙긴 투기자들이 은행과 보험회사 주식, 지방의 별장을 매입하면서, 전반적인 가격 상승이 유발됐고 투기의 대상도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러 시장이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토지가격이 남해회사 거품의 시세에 따라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투기자들이 미시시피 거품에서 이익을 실현하기 시작하면서, 1719년 가을 토지 가격이 상승했다.

위기다운 위기의 대부분에는 적어도 두개의 투기 대상과 두개의 시장이 개입된 셈이다. 여러 나라의 시장이 연결돼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기도 그 기저의 신용 여건에 의해 서로 관련을 맺는 모습이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부동산과 주식 거품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부동산가격이 상승할 때는 건설 업종도 호황을 맞을 가능성이 높고 건설회사의 시장가치도 상승하기 쉽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이어질 때는 은행의 대출손실이 - 부동산 담보 가치의 상승에 따른 방어 효과로 - 추세 이하로 떨어질 확률이 높다. 또한 부동산과 주식의 친화 관계를 감안할 때, 부동산가격이 하락하면 주가도 하락하기 쉽다.

투기의 근원은 부분적으로 관용적인 제도에 있다.

잉글랜드는 주식 장사치들에게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멋진 곳이죠. 이사회 때 한 자리에 몇 파운드만 주면 귀족 나리들은 어느 회사의 이사회라도 기꺼이 이름을 팝니다. 한편 그 백성은 어떻습니까? 제 정신이 아니고 천치들이죠. 세상에, 아마도 베사라비아의 농부나 카메룬의 흑인들처럼, 마치 무슨 마술인 양 그들이 믿는 대로 그냥 믿는 사람들 말고는, 도대체 그런 국민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완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리는 아무 사업이라도 내걸어 놓기만 하면 이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는 겁니다.

인플레이션은 통화량의 증가에 달려 있다.

자산가격 거품은 신용의 증가에 달려 있다.

투기적 광기는 통화와 신용의 팽창을 통해 그 속도가 빨라진다. 통화와 신용의 팽창 대부분이 광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경기 확장기의 빈도가 광기의 빈도보다 훨씬 더 높다. 그러나 광기가 발생할 때는 항상 신용의 팽창을 동반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신용의 팽창은 거의 전부가 은행과 금융 시스템을 경유해 벌어졌다.

신용의 팽창은 많은 사례에서 이전의 전통적 화폐를 대신하는 대체 수단의 개발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전반 미국과 중국, 영국간의 삼각무역에서 은이 환어음으로 대체됨에 따라 신용 팽창이 나타났다.

1882년 프랑스의 신용 팽창에 길을 열어준 다양한 제도적 경로 가운데 하나는, 지불 시점을 연기해 주는 르뽀따쥬 라는 방식을 통해 투기자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격주간 주식매매 정산 시스템에 기초한 것이었다. 주식 매수자들은 매수 시점후 최대 14일 이내에 매수 대금을 결제하면 됐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결제일까지 사실상 무이자 대출을 받았던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뉴욕 콜머니 시장의 신용 팽창이 1920년대말 주식시장 상승세에 동원된 자금을 조달해 주었다.

1920년대 미국에서 급격히 늘어난 할부신용은 자동차 보유대수가 대폭 신장되는 길을 터주었다.

신용의 팽창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작용이 아니라, 수백년동안 이어진 체계적인 발전과정으로서 금융시장의 참여자들이 거래비용과 유동성 및 현금잔고의 보유비용, 두가지 모두를 줄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화 팽창은 임의적이고 외생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내생적인 과정이다.

금속의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금속화폐의 화폐 통용을 폐지한 것 - 처음에는 구리가 은으로 교체됐고, 이어서 금이 은의 통화 역할을 잠식해 들어갔다 - 은 통화 공급량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각국의 중앙은행은 통용 지폐의 발행 독점권을 획득하고자 민간은행, 지방은행, 주식회사 은행들이 갖고 있던 통용 지폐의 발행 권한을 제한하다가 이어서 폐지했다.

화폐의 역사는 주어진 통화 공급량의 보다 효율적인 활용을 목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혁신과 통화에 적용되는 형식적 규정을 우회하기 위해 전통적 통화에 가까운 대체수단 개발의 연속이다.

그들은 단순하고 자동적인 원칙을 갈망했는데, 영란은행의 폭넓은 신용조치를 선도하기에 적합한 원칙은 발견하지 못했다.

활용가능한 매력적 사업 기회를 토대로 하는 신용 팽창이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통화학파의 견해는 옳다. 경기확장 국면이 시작될 때 신용 공급의 증가가 필요하다는 은행학파의 견해 또한 옳다. 실제 상거래에서 인수된 어음만 할인될 수 있어야 한다는 통화학파의 견해는 실질어음주의로 알려져 있다. 사업기회가 많아질수록 어음 할인의 범위도 학대되고, 또 통화 공급량도 더 크게 늘어나 결국에는 물가상승률도 커지게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정책 문제는 일단 신용 팽창에 발동이 걸렸을 때 도중에 멈춰야 할 제동 지점을 법으로 정의하는 것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이 제한선을 자동적인 규칙으로 규정핫 수 있을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통화를 정의하기는 쉬워도, 유효 통화 공급량을 계측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계산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계산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잡은 역사적 사실은 매번 통화당국이 모종의 화폐량, 즉 M을 그 절대 크기나 미리 정한 증가율을 잣대로 삼아 안정화 내지 통제할 때마다, 호황기 중에 화폐와 유사화폐 대체상품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유동성을 구비한 유가증권들을 일일이 명시해서 화폐의 정의가 고정된다 해도, 풍요감이 지배하는 호황기에는 바로 그 정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신용을 화폐로 만드는 과정이 유발될 수 있다.

이 과정은 화폐를 M1(통화에 여러가지 요구불예금을 합한 값)으로 정의해야 할 것인지, M2(M1에 정기예금을 합한 값) 혹은 M3(M2에 유동성이 높은 정부 발행 유가 증권을 합한 값), 나아가 모종의 다른 항목들로 정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과 함께 이어져왔다.

이 과정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통화량 지표 Mi를 고정시킨다 해도, 시장은 경기 호황기에 새로운 형태의 화폐와 유사화폐 대체 상풍들을 창출해 그 한계를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1959년 영국의 래드클리프 위원회는 선진경제에서는 무한정하게 넓은 범위의 금융 기관들이 존재하며 화폐에 가까운 데체상품으로서 화폐만큼의 보유가치가 있고 오직 실제의 결제 순간이 다가올 때만 화폐보다 열등한 고 유동성 자산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래드클리프 위원회는 화폐의 유통속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폐의 유통속도에 모종의 한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역사상의 경험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화폐, 즉 돈을 귀금속으로 정의하든 아니면 은행권도 함께 포함시키든, 일정 시점에서 어느 개인의 구매력은 실제로 그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으로 계측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구매력은 실제로 그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으로 계측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구매력을 구성하는 것은 첫째, 그가 소유하고 있는 돈이고, 둘째 그의 은행 예치금과 그가 요구하면 지급받을 수 있는 다른 곳에 빌려 준 모든 돈이다. 셋째는 그가 어떻게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신용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개별 차입자들, 즉 기업, 정부, 심지어는 가계가 가지고 있는 채무의 질에 순위를 매기기 위해 설립되었다.

경기 둔화기에는 매출이 예상했던 속도보다 느리게 증가하는 기업들이 많아져 헤지금융 집단에 속하던 기업일부가 투기금융 집단으로 밀려나고, 투기금융 집단에 속하던 기업 일부가 폰지금융 집단으로 옮겨가는 일이 벌어진다.

감독 당국은 대다수 금융기관들이 투자등급에 미달하는 채권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어서, 일단 신용순위 경계선 너머로 밀려난 채권은 은행과 보험회사 등이 곧바로 매도 물량으로 내놓기 때문에, 이들 채권의 금리는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

매수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정크본드의 판매 논리는, 정크본드(다양한 정크본드들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매수해두면 채권 발행 기업의 파산으로 하나 또는 서너 개의 정크본드가 휴지가 되더라도, 나머지 보유 채권에서 나오는 높은 이자 소득이 그 손실을 메우고도 남을만큼 충분하기 때문에 공짜 점심을 먹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차입금을 동원한 기업인수에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정크본드를 발행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어떤 회사의 고위 경영자들은 인수대상 기업의 상장 주식을 전량 매수하는 일을 벌이곤 했다.

저축기관들은 미국 정부의 보증을 기반으로 예금 계좌를 판매했고, 매우 높은 예금 금리를 지급했으며, 이 예금 계좌의 수신금액을 밀켄과 드렉셀 번햄 램버트가 인수한 정크본드를 사들이는데 사용했다. 드렉셀 번햄 램버트가 인수해 준 정크본드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절반 가량이 파산했고, 그 결과 저축기관들은 거액의 손실을 입었다. 결국 고수익 채권에 밥상을 차려준 격인 이들 저축기관의 다수가 파산했고, 미국 납세자들에게 수백 억 달러의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합법적으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1980년대 정크본드의 시대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카우프만은 채무의 양이 증가할수록 채무의 질은 하락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경기 둔화기에 정크본드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다수가 파산했다. 일련의 조사 작업에서 정크본드 소유자들은 평균적으로 투자 원금의 3분의 1을 잃었고, 일반 채권에 비해 연간 3~4% 높은 이자 소득으로는 채무 불이행에 따른 거액의 원금 손실을 만회하기에도 부족했다.

정크본드 발행 기업 가운데 다수가 파산한 것은 민스키의 자금조달 유형 구분과 일맥상통한다. 이 채권들 가운데 다수는 발행 초기에 경기가 좋았을 때는 투기금융 집단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후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채권 발행 기업의 현금 수입이 감소함에 따라 이들 채권은 폰지 금융 상태로 넘어갔을 것이다. 채무 불이행을 피하려면 경제 기적이 일어나야 했던 상황이었다.

1994년에 출범한 헤지펀드인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는 자기자본 50억 달러에 은행, 투자은행, 연금기금으로투터 빌린 차입금이 1250억 달러를 넘어서는 규모였다. 25대 1에 달하는 이 같은 차입금 비율은 일반적으로 10대 1 미만이었던 여타 헤지펀드의 차입금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당시 주식거래는 파리와 리용에서 격주 정산으로 이루어졌다. 매수자는 매수 가격의 10%를 주식보유증거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90%는 거래중개인으로부터 빌렸는데, 거래중개인들은 다시 콜머니 시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대출했다. 이 콜머니 시장의 자금은 은행과 특수금고, 개인들에 의해 하루짜리 대출, 즉 르뽀(Repo)로 투자됐다.

시장에 큰 변화가 없을 때는 투기자들이 수익을 내기도 하고 손실을 보기도 하는데, 이들의 수익과 손실 비용이 대체로 (이를 테면 10%로) 같다고 가정하면, 중개인들의 현금 유출입은 매우 좁은 범위 내에서 되풀이된다. 그러나 주가의 상승이 이어지면 매도 차익을 실현하고 시장에서 인출되는 수익금을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진다. 이 자금은 종종 시장에 재투자되었지만, 재투자 되지 않을 경우에는 시장에 더 많은 자금 수요가 발생했다. 가령 어느 투기자가 어떤 주식을 100프랑에 샀다고 하자. 그는 10프랑을 지불하고, 90프랑은 빌리게 된다. 만약 이 투기자가 그 주식을 110프랑에 매도해 20프랑(투자원금 10프랑과 매도차익 10프랑)을 인출한다고 하면, 시장밖으로 인출되는 이 20프랑 가운데 11프랑은 새로운 투기자의 주식보유 증거금(매수 대금 110프랑의 10퍼센트)으로 시장에 유입되지만, 9프랑은 새로운 르뽀를 통해 콜 시장에서 가져와야 했다. 주가가 상승할 때는 신규 자금을 유인하기 위해 콜머니에 대한 금리도 상승했다. 콜머니 금리는 1880년말 4~5%에서 1881년 봄에는 8~10%로 상승했고, 1881년 가을에는 최고치인 12%에 달했다.

이와는 반대로 주가가 하락할 때도 신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경우는 투기자들이 가져와야 했다. 어느 투기자가 10프랑의 주식보유증거금과 90프랑의 르뽀로 주식을 100프랑에 매수했는데, 주가가 90프랑으로 하락한다면 이 투기자는 10%의 보유증거금을 충족하기 위해 9프랑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 투기자가 이전에 가용 신용을 모두 소진해 증거금 요청을 충족시킬 자금이 전혀 없을 경우 중개인은 투기자의 보유 물량을 매도했다. 주가가 90프랑 밑으로 하락하면 대출을 제공한 중개인이나 은행, 개인이 손실을 입었다.

9대 1의 높은 차입금 비율에 의존하는 투기 그리고 은행과 개인의 신용에 의존하는 신용 메커니즘이 결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충격은 콜머니 시장을 타고 번지며 수 일 만에 은행, 특수금고, 중개인, 개인, 기업 사이에 붕괴를 확산시켰다.

비단 상인, 각종 제조업자, 소매상, 의류 거래상, 식료잡화상, 정육점 주인, 고정소득 생활자, 수위, 제화 판매상이 투기에 가담했고, 거액의 자본이 정규 사업에서 이탈해 증권과 콜머니를 거래하는 주식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와 이 시기 프랑스 은행들의 몰락 사이에는 몇가지 유사한 특징이 있다. 주식시장이 정점에 가까워지면서 투기에 대한 강박 관념과 경제활동의 감퇴가 나타났고, 통화 공급량에 별 변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래중개인에 대한 은행 및 개인의 대출이 주가 상승과 하락의 토대 역할을 했다. 또 한가지 유사점은 주가가 최고점을 향해 치달으면서, 콜 여신 총액에서 뉴욕 소재 은행들과 뉴욕 외부의 은행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금융기관의 콜 여신액이 1926년말 20억 달러를 약간 밑도는 수준에서 1928년 12월 31일에는 거의 40억 달러로, 그리고 1929년 10월 4일에는 66억 달러를 웃도는 규모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신용거래가 허용되는 신용한도도 매우 컸다.

붕괴와 동시에 나머지 모든 금융기관과 뉴욕 외부 은행들은 시장에서 콜 자금을 회수했다.

은행권과 환어음이 주화보다 더 효율적인 화폐인 것처럼, 자본시장 규모가 큰 나라의 통화로 표시된 유가증권의 형태로 대외준비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통화와 관련된 상태가 안정적이기만 하다면) 금괴를 보유하는 것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다. 이런 자산들은 거래하기가 더욱 편리하고, 운반 및 보호감시, 시금 분석의 부담도 없으며, 환전하지 않고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

광기와 붕괴가 신용 공급의 불안정성에 기인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와 함께 그가 점검한 것은 통화 공급량의 변화 시점과 금리의 변화 시점 사이의 관계였다.

또 다른 분석가는 주가의 급락이 명목적 부와 가계의 지출을 위축시켰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부의 실질 가치가 소비의 변동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암묵적 가정이 자리잡고 있다.

1929년의 산업생산지수는 6월 127에서 9월 122, 10월 117, 11월 106, 그리고 12월에는 99로 떨어졌다. 자동차 생산량은 1929년 3월 66만대에서 8월 44만대, 10월 32만대, 그리고 12월에는 9만대로 감소했다. 이처럼 큰 폭의 감소는 통화 공급량의 변화나 지출의 자율적 조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오히려 이 같은 감소는 신용 시스템의 불안정성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주식시장이 정점을 향해 가는 동안 자금이 소비와 생산에서 이탈해 콜머니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주식시장이 붕괴했을 때 신용 시스템은 금세 얼어붙었다.

중심적인 문제는 중앙은행이 신용의 불안정성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위험한 단계로 확장되지 않도록 투기를 둔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다.

통화 공급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거나, 자금시장의 유동성을 제한하거나, 혹은 풍요감에 들뜬 투기 징후가 최초로 발현하는 시점에 재할인율을 인상하는 등의 중앙은행 정책이 위기로 이어질 광기를 예방해 줄 것인지의 여부는 미리 선험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

만약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들은 신용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신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신용의 무한정한 팽창 가능성에 내재하는 불안정성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신용의 팽창을 제한할 수 있는 확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 기대 이론은 투자자들의 기대가 각각의 충격에 대해 거의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각각의 충격이 부동산과 주식, 상품의 장기균형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즉각적으로 꿰뚫어 본다고 가정한다. 반면 금융의 역사를 돌아보면, 먼 미래 시점의 가격과 가치에 대한 현재 시점의 예측이 이보다 앞선 시점의 전망과 다르다는 것을 서로 다른 집단들이(어떤 때는 서로 다른 시점에, 어떤 때는 거의 동시에) 인식함에 따라 현실 세계의 기대는 느리게 변하기도 하고, 빠르게 변하기도 한다는 추론을 얻게 된다.

기업과 개인을 포함한 일부 차입자들이 소득에 비해 채무가 과대해졌음을 인식하면서 투자자들의 마음이 확신에서 비관론으로 변하는 것이 신용시장에 잠재하는 불안정성의 근원이다.

대여자들은 위험한 대출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차입자들의 미결제 채무의 상환을 추진한다. 대여자들은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의 연장을 꺼리게 되며, 동시에 신규 대출에 대한 여신 기준을 강화한다.

정부는 경기순환의 굴곡을 완화하기 위해 개입해야 하는가?

투기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 이상의 지식을 정부가 알고 있다면, 정부가 그 지식을 제공하거나 정부의 예측을 공표하는 것이 적합한 대책이라는 제안이 제기된 바 있다.

정부 내에서도 많은 인사가 경제와 금융시장의 전망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경우가 자주 있으므로, 정부의 견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누군가(총리, 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가 합의된 의견을 짜내는데 성공할 때만 가능하다.

정부 당국자의 언급이 풍요감을 완화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역사적 기록은 거의 뒷받침하지 않는다.

연 20~30%의 속도로 자산가격의 상승 행진이 진행될 때, 투자자와 투기자들이 정부 당국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19세기에 은행감독당국은 투기 확대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오히려 경고가 위기의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위기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837년 봄 이 도박 바람이 도버 해협 너머로 번지자, 벨기에와 프랑스 당국은 기업어음과 주식의 유통 및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투기 억제를 시도했다. 이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투기가 증권거래소의 좁은 틀을 뛰어 넘어 전개되었고 연금 및 금리생활자 심지어는 가정주부와 외국인 같은 비전문가들까지 투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경고들은 효과가 없었다.

그는 1929년 월에 미국의 주가가 지나치게 올랐고, 1907년 패닉을 연상케 하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미국 대중에게 경고했다. 이어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유사한 성명을 발표했다. 투자자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이어 주가는 다시 상승했다. 미국의 주가 수준이 비이성적으로 과열됐다 고 지적한 1996년 12월의 그린스펀 FRB의장의 언급 역시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다.

이 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계속 상승한다는 것은 경고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경제전망가들은 부동산과 주식의 장기균형 가치를 알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알고 있다고 그들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평균가치에서 이탈한 시장가격이 언제 다시 균형점으로 되돌아올지 그 시점을 예견하는 능력은 미미하다.

시점 선택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정부당국의 경고가 효과적이려면, 호황 국면에서 발생하는 과잉을 어느 정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성명을 충분히 일찍 내놓아야 하지만, 성명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늦은 시점에 내놓아야 한다.

FRB 전 의장의 비유를 들자면 당국은 대중의 비우호적인 반응으로 인해 잔치가 막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잔칫상을 걷어내기를 꺼려한다.

소비자물가 수준이나 어떤 다른 물가지수의 상승을 누그러뜨리는 통화정책을 개발하는 데서 편안함을 찾는 게 중앙은행들의 현대적 전통이 됐다. 인플레이션 목표관리가 중앙은행들이 즐겨 찾는 새로운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성명을 통해서만 투기자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불안은 국가 경제 차원에서는 쉽게 계측되지 않는 상태다.

투자자들은 일정한 변수의 값이 평균치에서 크게 이탈할 때 걱정에 빠져들기 쉽다.

어느 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대외채무 비율의 경우, 60%라는 경계선을 불길한 지표로 간주하는 투자자들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 비율이 60%를 훨씬 초과할 경우 그 나라는 살얼음판이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GDP 대비 정부채무의 비율이 60%를 크게 초과하면 과다한 것으로 간주된다. 1857년 영국 재무대신이 지적했듯 이 한계점의 설정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한도를 설정하게 되면, 위기 발생시 사람들이 그 한도를 인식하고 있는 한 그 한도의 존재 자체가 위기감을 더욱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고정된 비율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고정 불변의 절대 한도에 대한 공포를 만드는 일로서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1924년 3월 세련된 은행업자들은 프랑스의 통화 공급량이 좀 더 늘더라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일반 대중은 이미 프랑스 은행의 재무부 대여금 상한선을 경제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간주하고 있었다.

불안의 원인이자 또 그 증상으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자본시장의 일부 또는 모든 영역에서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우량 등급의 차입자가 지불하는 금리에 비해 우량 등급 이하 차입자가 지불하는 차등금리가 상승한다. 외환시장에서 통화가치가 급락한다. 파산 건수가 증가한다. 상품과 부동산, 유가증권의 가격 상승이 멈춘다. 이런 상황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전개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여자들의 여신이 이미 과도하게 확장된 상태여서, 대여자들이 위험의 노출, 특히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연쇄편지와 같은 양상으로 증권이 발행됐다는 사실은 남해회사가 1720년 6월, 7월, 8월에 걸쳐 반복적인 신주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1881년에는 125건이 넘는 시가 50억 프랑 규모의 신규 발행 주식이 파리에서 판매됐는데, 그 무렵 프랑스의 연간 저축액 추정치는 20억 프랑에 불과했다.

상당수 투자자들이 자산가격의 상승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에 근거해 자산을 매수하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자산가격의 상승 국면이 끝남과 동시에 불안 국면이 시작된다.

금융 불안은 나라 밖으로의 자금 유출이 증가함에 따라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 유출은 수면 밑에 잠복하면서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금융 불안의 본질은 신뢰의 상실이다.

1982년 8월 이후에는 멕시코, 브라질 등 개발도상국에 대한 은행 여신에서, 또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로 오를 것이라는 전망을 기초로 탐사활동을 벌였던 차입자들에게 거액을 대출해준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텍사스의 저축기관들에서 불안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1980년대 말 수백개에 달하는 미국의 은행과 저축기관들이 파산한 뒤, 미국 정리신탁공사는 대출담보로 설정돼 있던 수백억 달러의 부동산을 취득했다.

1990년대 도쿄의 불안 국면 역시 장기간 지속되었다. 일본 대형 은행들의 자산가치에 대해서는 그 어느 시가평가 기준으로 검증하더라도 대부분 파산 상태였고, 다만 은행이 파산해도 정부가 예금을 보전해줄 것이라고 예금자들이 간주했기 때문에, 은행 예금의 인출쇄도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파산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이 불안국면을 조장한 한 원인이었다. 정부가 이들 파산 은행들을 청산할 것인지, 아니면 이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신규 자본을 주입할 것인지가 불확실한 상태로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의 주가 폭락은 패닉이 아니라 조정이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1998년 여름의 LTCM 대란은 러시아 금융시장의 붕괴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임박한 러시아의 재앙이 유발한 금리와 수익률 관계의 변동이 사실 LTCM을 붕괴시킨 결정타로 작용했다.

자본금은 50억 달러였고 부채는 1250억 달러에 달해, LTCM은 일반 은행이나 대부분의 헤지펀드에 비해 자본금 대비 차입금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사업 초기의 여러 해 동안 LTCM은 돈 버는 기계로 여겨졌고, 매우 유사한 금융자산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가격 편차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일에 극도로 영리했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는 폭넓게 거래되었지만 29년 만기 국채는 거래량이 적었는데, 29년 만기 국채가 그만큼 유동성이 작압기 때문에 수익률은 30년 만기 국채보다 약간 높았다. 이 틈새를 노리고 LTCM은 수억 달러 규모의 만기 국채를 매수하는 동시에 거의 같은 금액의 30년 만기 국채를 공매도해, 그 수익률 차이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매매를 하곤 했다.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에 대한 29년 만기 국채 수익률의 초과분은 미미했지만, 이 작은 수익률 차이에 수억 달러의 포지션을 곱해서 산출되는 이익은 큰 금액이었다.

1998년 봄 LTCM은 이머징마켓 채권에 매수 포지션을 취하고, 이에 대한 헤지수단으로 미국 국채를 공매도했다. 러시아 금융시장의 장래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증폭되자, 이머징마켓간의 파급효과가 작용하면서 이머징마켓 채권의 가격이 하락했다. 더구나 FRB가 통화정책의 고삐를 풀고 유동성을 확대하자 미 국채 가격은 상승했다. LTCM은 헤지의 양쪽 방향 모두에서 발생하는 손실로 인해 자본금 기반이 흔들렸다.

금융 불안에 뒤따르는 붕괴나 패닉은 곧바로 일어날 수도 있고, 수주 혹은 수 년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1907년 10월의 패닉은 예상된 것이었고(비록 스프라그는 패닉의 정확한 시점을 예상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지만), 당시 어음거래에서 자금조달용 담보로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유가증권이었던 유니온 퍼시픽 주식이 50포인트 떨어진 부자들의 패닉이 그에 앞서 3월에 일어났다. 이 부자들의 패닉이 가져다 준 타격에서 시장은 곧 회복됐다. 또 시장은 6월 뉴욕시의 채권 공모 실패(4%의 금리 채권의 공모 규모 2900만 달러 대비 200만 달러만 청약 신청)로부터 회복했고, 7월의 구리시장 폭락과 8월 반독점법 위반으로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에 대한 2900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는 사태로부터 회복했는데, 10월 니커바커 신탁회사의 파산에는 굴복했다. 1929년의 불안 국며은 6월부터 10월의 마지막 주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에서의 불안 국면은 1990년대 출발과 함께 시작해 10년 넘게 지속됐다. 일본 제조업체들은 회사의 비용을 그들의 경상적인 수익 아래로 낮추는 데 필요한 기업 규모의 축소와 구조조정을 극도로 기피했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일본 기업들이 영업수지 적자를 메우고, 투자자금을 조달할 때면 언제든 은행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은행들은 신규 대출을 중단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심지어는 그 어떤 시가평가 기준에서도 파산 상태로 간주되는 기업들에 대해서까지 마찬가지였다. 또한 감독당국은 파산 상태로 간주되는 은행들의 폐쇄를 피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금융 손실의 위험을 사회가 떠 안았다. 파산한 기업의 폐쇄에 수반되는 구조조정 비용을 이들 기업의 피고용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보다는, 그 손실을 납세자 집단에게 분담시키는 편을 사회가 선호한 것이다.

1990년대 동안 아르헨티나 정부의 조세 수입은 정부 지출보다 작았고, 조세 수입을 초과하는 정부 지출은 민영화에서 얻은 수입과 정부의 차입금으로 조달했다.

1990년대 말로 치달으면서 미 달러화 가치의 상승과 함께 달러화에 고정된 페소화의 외환가치 상승이 부분적 원인이 되어, 아르헨티나의 경기후퇴가 발생했고, 정부 지출에 비해 조세 수입이 감소함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재정적자가 확대됐다. 1998년 1월 아르헨티나의 주요 무역 상대국인 브라질 헤알화의 외환가치 하락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경기 후퇴가 더욱 악화됐다.

세율을 인상하고 정부 지출을 축소하는 정책이 추진되자, 일련의 정치적 문제가 터졌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불경기에 더 많은 세금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나라는 천천히 파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투기의 비용을 높이기 위해 통화당국이 신용을 축소한다고 가정해보자. 상품과 자산시장이 상승이든 하락이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통화당국이 선택해야 할 방향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가가 부동산 가격중 하나 또는 둘 다 급등하는 반면, 상품가격이 안정적이거나 하락한다면 정책당국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1920년대 미국의 FRB가 이 같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 딜레마는 정책 입안자가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을 수 없다는 문제,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정책 수단으로 두가지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도 1980년대말 부동산시장에서 이 문제에 봉착했다. 즉, 주택가격이 100년 또는 3세대나 걸치는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아야만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만약 부동산 경기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용을 축소한다면 괄목할 만한 경기 확장 국면도 동시에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린스펀 의장은 1996년 12월 비이성적으로 과열된 주가에 대해 그의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미국의 주가가 너무 높고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고용에 대한 부정적 영향 때문에 FRB가 주가 상승을 제어하기 위한 금리 인상을 회피한 것으로 나중에 판명됐다.

그 사이 어디론가는 가야만 했던 자금이 주식시장의 투기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어떤 위기라도 그 원인은 신용의 팽창과 투기인 반면, 근인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려 투자자들이 상품이나 주식, 부동산, 환어음 또는 약속어음 등을 매도하고 현금 보유액을 확대하도록 유인하는 무슨 사건이다. 파산, 자살, 도주, 사기의 폭로, 어떤 차입자들에 대한 여신 거부, 혹은 거액의 포지션을 보유한 시장 참여자의 매도를 부추기는 모종의 관점 변화등 근인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투자자들이 주식과 부동산 매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차입 자금을 끌어다 쓴 만큼, 가격 하락은 추가 증거금이나 부족한 현금 청구를 유발하게 되고, 더 많은 주식과 부동산의 처분을 야기하기 쉽다. 가격 하락이 더욱 진행되면, 은행의 대출손실이 증가하고, 하나 또는 다수의 상사, 은행, 어음할인회사, 거래중개회사가 파산한다. 신용 시스템이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면서 유동성 확보를 향한 경주가 벌어진다.

최초의 매도자들을 식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은행권의 유통량을 축소시키려 하면, 반드시 시장을 심하게 압박해야 하고, 패닉을 야기할 위험이 따른다. 국립은행은 규모도 작고 경영이 취약한 이 수많은 기관들(지방은행들)의 채무상환 능력을 책임져야 했지만, 신용의 총체적 붕괴를 야기할 위험 때문에 이들에게 반제를 요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폭스웰은 이 딜레마를 명료하게 제시해 놓았다. 규정을 적용하지 않으면 신용시장이 위험한 수준까지 팽창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규정을 적용하자니 거품에 구명을 내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품의 속성은 언젠가는 구멍이 나서 아이들이 갖고 노는 풍선처럼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부동산가격과 주가 거품은 1990년 초 은행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대출총액의 증가율(연 5~6%로 예상됐다)을 초과할 수 없도록 제한한 신임 일본은행 총재의 명령에 의해 구멍이 났다. 부동산 대출의 증가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부동산 매수를 위해 신용을 끌어 쓰던 개인과 기업의 일부가 예전의 차입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한 신규대출 자금을 충분히 얻을수 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들은 취득한 부동산의 일부를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사건이 거품을 파열시켰을 것이다.

상당수의 컴퓨터가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날짜 전환을 인식하지 못해 컴퓨터 시스템이 마비될 지도 모른다는 소위 Y2K 문제에 대비해, FRB는 1999년 하반기 동안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때 풀린 유동성의 일부를 회수하기 위해 2000년 들어 FRB가 취한 조치가 1990년대 말에 형성된 미국 주가의 거품을 트뜨렸다. FRB는 예상되는 문제가 있으면 경제 시스템에 공급하는 유동성을 늘려서 그 문제를 풀어가려는 편향된 성향이 있어서, 1999년 말이 가까워질수록 유동성 공급이 확대됐다. 자금은 어디론가 가야 했고, 일부 자금은 주가를 올리는 데로 흘러갔다. 새로운 천년의 전환은 재앙 없이 넘어갔는데, 풀려 나간 유동성의 회수는 금리 상승을 초래했다.

아시아 국가 다수에서 형성된 거품은 전염 효과의 작용 때문에 1997년에 폭발했다.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의 평가절하는 다가올 재앙을 알리는 낭랑한 나팔 소리와 비슷했다. 대만과 싱가포르를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해외에서 차입한 자금으로 조달됐다. 또 아시아 각국의 기업들은 자국 통화의 차입 금리에 비해 금리가 훨씬 낮은 달러화 자금의 차입에 열심이었다. 바트화가 평가절하되자, 외국인 대여자들은 아시아 국가들이 해외 자금을 계속 빌려올 수 없을경우, 자국 통화의 외환가치를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자본 유입은 줄어들었고, 자기실현적 예언이 작동됐다.

위기 대응을 위해 채택한 정책은 종종 시차라는 문제에 부딪친다.

하나의 해석에 따르면, 이 때의 호황 국면은 영란은행이 자신의 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뒤늦게 재할인율을 인상하기 전에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상품가격의 하락에다 통화 긴축이 더해진 것이 위기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영란은행이 방향을 바꿔 금리 인하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은행학파는 호황이 정점을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재할인율 인상이 정화의 유출을 막고 즉각적으로 자금흐름을 되돌린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적으로 여신을 일정한 한계 안으로 통제하는 일에서 황금률이란 없다.

재할인율 정책의 시차와 오류 외에도, 불안 국면의 초기 단계에서 정책 당국의 급작스런 조치가 패닉을 일으킬 수 있다.

영란은행은 지나치게 큰 규모의 신용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대응했다. 그러나 신용은 섬세한 사안이어서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반면 주식시장의 패닉은 큰 돈을 움직이는 내부 투기세력이나 뮤추얼펀드, 연금기금, 보험회사 같은 기관투자자들 - 아마도 이들 가운데 여럿은 유사한 프로그램 매매 모델을 따를 것이다 - 의 매도로 유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금융위기는 붕괴와 패닉 중 어느 하나 혹은 둘 다를 포함할 수 있고, 붕괴가 패닉을 뒤따를 수도 있고 반대 순서로 진행될 수도 있다.

1929년 뉴욕시장의 붕괴와 패닉은 상품시장의 부동산시장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고, 신용시장의 마비로 인해 소득, 고용, 생산 모두가 급격히 위축됐다. 그러나 FRB가 시장에 자금을 쏟아 부은 덕분에, 금리는 상승하지 않았으며 자금시장에서는 패닉이 일어나지 않았다.

붕괴와 패닉으로 몰고 가는 시스템은 되먹임 강화 과정의 하나다.

자산가격과 상품가격의 하락을 동반하는 부채 디플레이션의 연쇄 과정에서는 담보가치도 감소하므로 은행은 기조ㅔ 대출을 회수하거나 신규 대출을 거부한다. 갈수록 물가가 떨어지기 때문에, 기업은 재고와 보유중인 상품을 서둘러 매각하지만, 물가의 하락으로 인해 파산하는 기업들이 늘어난다. 가계는 유가증권을 매도하고, 기업은 차입과 투자를 미루게 되고, 물가 하락이 계속 이어진다. 대출 담보가치의 하락이 심화될수록 차입자들의 청산을 더욱 부채질한다. 기업의 파산은 은행의 대출손실과 파산을 의미한다. 은행이 파산함에 따라 예금자들은 현금을 인출한다. 예금 인출로 인해 은행은 더 많은 대출을 회수해야 하고, 더 많은 유가증권을 처분해야 한다. 당장 써야 할 현금이 부족한 상사, 제조업체, 투자자, 은행은 보유 자산 가운데 고위험도의 유가증권은 아무리 낮은 가격으로도 팔리지 않기 때문에, 최우량 증권들을 매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우량 증권들의 가격도 떨어진다.

그러나 파산이 시작되면 싫어도 부실대출의 가시를 빼내야 한다.

은행만이 아니라 가계, 기업, 은행은 한 줄로 쌓은 벽돌과 매우 비슷해서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전부가 위험해진다.

패닉이 절정에 달할 즈음에는 돈 구할데가 없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미국의 주가가 큰 폭으로 무너져 내린 뒤인 2001년의 경기후퇴가 비교적 완만하고 짧았던 것은 FRB가 신속하면서도 공격적인 금리 인하로 정책방향을 급선회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부동산 담보대출의 차환이 크게 늘어났다. 수백만 명의 개인들이 부동산 담보대출을 보다 낮은 금리로 차환하고, 차환에서 얻은 현금의 상당핵을 자동차나 내구소비재를 구입하고, 휴가비용으로 썼다. FRB는 단기 금리를 1% 수준까지 낮췄는데, 물가상승률이 거의 2% 였으므로 단기 실질금리는 마이너스였다. 이로 인해 나타난 결과의 하나는 주택시장의 호황이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29년에 착공됐다. 1980년대 말 무렵에는 세계적으로 고층 건축물을 지을 때 쓰이는 타워크레인의 절반 정도가 도쿄에 집결한 것 같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 타워크레인의 상당수가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초고층 빌딩과 자산가격 거품 사이의 관련성은 강하다.

1980년대 말 일본의 베스트셀러 서적 가운데 하나가 일등국가 일본 : 미국에 대한 교훈 이었다. 태국,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부동산 가격과 주가 거품이 꺼지기 수 년 전에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기적을 발간했다.

자산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가계의 부의 변화는 가계 지출과 기업 지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이 국민소득의 성장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되먹임의 고리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계의 부의 증가가 가계 지출의 증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다. 가계는 저축과 부에 대한 목표 수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산가격의 급등 덕분에 그들의 부가 증가하면 기존의 소득 가운데 저축하는 부분은 줄어들고 소비지출은 늘어난다. 두번째 고리는 주가 상승이 투자지출의 증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다. 주가가 상승하게 되면 기업들은 더 적은 비용으로 기존 투자자와 신규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이익률이 좀 낮더라도 신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주가는 경제 활동의 변동을 미리 반영하는 선행지표 라는게 세간의 속설이다. 특히 최근 세 차례의 경기 후퇴 국면에서 주가 변동이 선행지표로서 보여준 예측력은 최고 점수로 나타났다. 미국의 주가는 1930년대 초 경제가 붕괴되기 4~6개월 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는 1990년 초 주가와 부동산가격 하락이 시작된 이후 하강하기 시작했다.

자산가격의 상승에 따른 경제 활동의 확대와 자산가격의 하락에 따른 경제 활동의 위축은 서로 대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경기 확장 국면에는 기업들이 순자산가치의 증가에 발맞춰 차입자금을 늘린다. 은행들도 대출을 늘리고, 대출 심사기준을 완화한다. 자산가격이 무너지는 시기에는 은행들이 대출손실을 입게 되고, 일부 은행들은 대출손실에 따른 자본잠식으로 파산하거나 자본기반이 보다 튼튼한 은행과의 합병이 불가피해지고, 심지어 정부의 신규 자본 주입이 불가피해지기도 한다.

이어서 가계가 부의 감소에 적응하기 위해 저축 기조에 돌입하면서 경제 활동은 급격히 둔화됐다.

당시는 금융발전의 초기 단계로 은행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선불 계약금이 전부 현물로 지불됐다. 화이트크라운 1파운드(네델란드어로 Witte Croon 이며 일반적인 품종이어서 무게 단위로 매매되었다) 에 525플로린을 양도 시점에 완납하고, 소 네마리를 먼저 지불하는 방식으로 거래했다. 그리고 희귀종 튤립인 비체로이 한 그루의 가치는 양도 시점의 완납 대금 2500플로린과 함께 현물 선불금으로 밀 2라스트(상품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계량 단위), 돼지 네마리, 양 열두마리, 포도주 2옥스헤드, 버터 4톤, 치즈 수천 파운드, 침대 한개, 몇가지 의류, 큼지막한 은제 컵 하나였다.

튤립 광기는 고립된 현상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가지수는 1630년에서 1639년 사이 두배로 상승했다.

호황의 절정기에 시계와 시계탑에 대한 광기가 일어났다.

주식시장에서 발생하는 거품의 대다수는 부동산 거품과 관계가 있다. 두 자산시장에는 세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에서 막대한 비중이 부동산회사, 건설회사, 은행 등 부동산과 밀접하게 관련된 산업의 기업들로 구성된다는 점인데, 많은 나라에서 이런 관계가 존재하며, 특히 작은 나라들이나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 있는 나라들에서 두드러진다. 두번째 관계는 부동산 가치의 상승을 통해 자신의 부가 급증한 개인들은 재산을 다양한 형태로 보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주식을 산다. 재산을 다변화할 수 있는 용이한 방법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세번째 관계는 두번째 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다. 즉, 주식시장의 상승으로 큰 수익을 얻은 개인투자자들은 더 크고 비싼 주택과 별장을 매입한다.

1928~29년 미국 주식시장의 상승세는 중심상업 지역과 교외 지역 모두에서 주택용지와 상가 건물의 가격 상승을 동반했고, 가격의 상승기와 하락기 모두에서 두 시장이 같이 움직였다.

어느 경우든 부동산 경기 과열이 무너지고 난 폐허 속에는 가공의 의제적인 가격임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비싼 부동산을 매입한 사람들이 남긴 작품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이들은 그 부동산을 이익을 남기고 팔아 넘길 수 있는 누군가 더 대단한 바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비싼 값을 기꺼이 지불했던 것이다.

자산가격이 폭락하면 주식 보유자들은 곤란에 빠졌음을 알고 채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 투자에 끌어 쓴 차입금 비중이 높은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부가 주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줄어들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주식을 매도한다.

부동산 투기자들은 가격 하락 초기에 그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한다. 이들의 부채는 하루하루 돌려야 하는 중개인 대출이 아니라, 은행에서 장기 대출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단지 서류상 청구권이 아니라 실물 자산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가 단지 한 고개만 넘으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회복기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한다.

경기가 하락세로 반전하면 부동산 수요와 건축 수요의 고갈이 초래된다. 하지만 대출에 부과되는 세금과 이자는 중단 없이 계속된다. 호이트는 부동산 투기자들이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넘어지게 된다고 썼다.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대출해 준 대여자들, 특히 은행은 대규모 대출 손실을 입는다. 1933년에 200개에 달하는 시카고의 은행들 가운데 163개가 지불 불능 상태에 빠졌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4800개 파산 은행의 손실액 가운데 개별 항목으로 가장 컸던 손실 요인은 파산한 주식중개인 계정이 아니라 채무 불이행 상태의 부동산 대출계정이었다.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관계에 관한 호이트의 분석은 1990년대의 일본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호이트의 분석은 주식시장이 붕괴되면 이에 뒤따르는 부동산 가치의 하락 반전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수출이 급속히 증가했고, 수출 품목도 값싼 완구와 섬유류에서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이어서 철강과 자동차, 전자제품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전반 내내 일본 정부는 금융통제를 완화해 나갔고, 1980년대 후반에는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을 제한하기 위한 일본은행의 광범위한 노력이 통화와 신용 공급의 급속한 증가를 가져왔다.

금융규제로 인해 은행예금과 채권 같은 고정가격 자산의 실질 수익률은 1950~1970년대에 걸쳐 계속 마이너스였다. 명목 금리가 연간 물가상승률보다 낮았다. 6개 대도시의 주거용 부동산 가격지수는 1955년 기준값을 100으로 할 때, 1970년대 중반에는 4100, 1980년에는 5800에 달했다. 이에 따라 부동산 소유자들은 플러스의 실질 수익률을 챙긴 매우 드문 집단 중의 하나였다. 1980년대 기간 중 부동산 가격은 9배나 상승했다. 그 최정점에 이른 시점의 일본 부동산 가치는 미국 부동산 가치의 두배에 달했고, GDP 대비 부동산 가치의 비율은 미국의 4배나 됐다.

1949년 5월 100으로 시작한 닛케이 평균주가는 1980년대 초 6000에 도달했다. 주가는 1980년대 후반에 급등이 1989년말 40000에 육박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주가 상승세를 이끌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 다수가 도쿄 중심부와 지방 주요 도시에 막대한 금액의 토지를 소유한 부동산회사들이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세와 금융규제 완화로 건설업은 붐을 탔다. 은행들은 거액의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부동산과 주식가치의 증가는 은행 주가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은행들은 국내 경쟁은행들은 물론 미국, 유럽의 다른 은행들에 비해서도 자신의 몸집-그들의 총체적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출규모를 늘리는 데 열중했다. 한편 부동산을 소유하는 데서 발생하는 수익률이 철강, 자동차, TV를 생산하는데서 발생하는 수익률보다 몇 배나 높았으므로, 부동산을 매수하려는 제조업체들의 차입 열기도 높아졌다.

일본은행은 이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재할인율을 1982년 5.5%에서 1983년에는 5%로 인하했고, 이어서 1986년 초에 3.5%로, 다음해에는 2.5%로 떨어뜨렸다.

일본은행은 1989년 12월 미에노 야스시가 신임 총재로 부임해 부동산 대출에 제동을 걸기 시작할때까지 금리 인상을 미루었다. 붕괴는 1990년 1월에 시작됐고, 몇몇 대형 은행들이 우대고객 대출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분식회계로 이런 손실을 은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붕괴의 물결이 더욱 강렬해졌다.

주가는 1989년 마지막 거래일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1990년에 30% 폭락과 함께 추락했다. 주가의 저점은 2002년에 기록했는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을 때에 비해 20%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부동산 가격은 주가에 비해 하락속도가 느렸지만 추락한 깊이는 거의 비슷했다.

자산가격 하락으로 인해 다수의 금융기관들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고, 단지 정부의 묵시적인 지원 덕분에 사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몇몇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폐업이 허락되거나 강제되기도 했지만, 손실을 입은 예금자는 없었다. 은행들은 문을 닫은 금융기관이 소장하고 있던 수천점의 프랑스 예술작품을 인수했다. 다수의 골프장들이 파산했다.

경제성장률은 급전직하했다. 물가상승률도 하락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절대 물가수준 자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품 형성에 발동을 건 일본은행의 재할인율 인하, 특히 1986년 이후의 금리 인하 조치는 미국가 다른 선진 국가들의 압력에 자극 받은 것이었고, 일본의 물가가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합리화됐다.

주된 문제는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자산가격에 관여해야 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다. 대부분의 중앙은행 책임자들은 물가안정을 통화정책의 주요 목표로 선택한다. 아주 최근에는 인플레이션 목표관리- 중앙은행들은 2%를 초과하지 않는 물가상승률 달성을 목표로 한다-가 정책 세계에서 즐겨 찾는 기도문으로 부상했다.

중앙은행 책임자들은 전통적으로 물가상승률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금리 인상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자산가격 거품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는 극히 꺼려한다. 심지어 사실에 기초해 거품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 같아도, 거품이 존재한다거나 과거에 존재했을 가능성마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2000년과 2001년 미국 주가의 급락은 그 이전에 자산가격 거품이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문제는 왜 FRB 외부의 사람들은 주가의 상승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다 쉽게 인식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나라들은 이웃 나라들을 강타한 국제적인 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명백한 이유들이 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패전 배상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이미 1871년과 1872년 혹독한 디플레이션을 겪은 상태였기 때문에 1873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1847년 당시 미국의 식량시장이 유럽의 식량시장과 밀접히 연결될 만큼 아직 국내 철도가 발달해 있던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은 그해 유럽의 감자 병충해와 난리법석을 떨었던 밀 사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금융위기는 탄환이 튀듯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파급된다.

국가간에 위기를 파급시키는 여러 유형의 연결 경로 가운데 하나는 각국 시장을 연결시키는 차익거래의 작용이다. 일물일가의 법칙은 여러 나라의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품들의 가격 차이가 운송과 무역장벽의 비용을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1929년 모든 나라의 주식시장은 동시에 붕괴했고, 1987년 10월에도 역시 주식시장의 거의 전부가 동시에 하락했다.

주식 소유를 여러 나라 시장으로 다변화함으로써 위험을 축소하려던 다수의 투자자들이 얻을 수 있는 위험의 축소 효과는 국가간 주가 변동의 강한 상관관계로 인해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졌다.

주가 변동폭이 작을 때는 국가간의 주가 변동의 상관관계가 작다. 그러나 주가 변동폭이 커짐에 따라 그 상관관계도 커진다.

다른 나라들의 주가 변동이 미국의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 미국의 주가 변동이 다양한 여러 나라의 주가에 훨씬 강력한 충격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주가 변동의 국가간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 비대칭적인 유형을 보인다.

1997년 7월 초 태국 바트화의 평가절하는 전염효과를 작동시켜, 그 후 6개월도 안돼 인근 아시아 국가들에서 평가절하를 유발했고 마침내 러시아와 브라질로 확산됐다.

다양한 나라들의 유가증권과 자산시장이 자금의 이동에 의해 연결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미국으로부터 독일과 일본 및 여러 국가로 향하는 자본이동을 초래했고, 그 결과 자본이 유입된 국가들에서 본원통화와 통화 공급량이 늘어나 물가상승률이 높아졌다.

자본이동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변화 외에 전쟁과 혁명, 기술혁신, 새로운 시장 및 원자재 보급지의 등장, 각국 경제성장률간의 관계 변화 등 실물적 요인에 반응할 수 있다.

한 나라의 통화의 외환가치 상승과 그 나라 재화시장에서의 디플레이션(혹은 한 나라 통화의 외환가치 하락과 그 나라 재화시장의 인플레이션)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경기의 상승과 하락 파동은 국제적으로 연결되며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한 나라의 경제 호황은 거의 예외 없이 해외로부터의 자금을 유인함과 동시에, 다른 나라들로 향하는 국내 자금의 유출을 축소시킨다.

1980년대 도쿄의 부동산가격과 주가 급등은 뉴욕과 마이애미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도쿄와 맺고 있는 하와이의 부동산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관광객들은 하와이에 자주 들르며,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에서 결혼도 하고, 다수의 일본인들이 하와이에 별장을 사두기도 했다. 일본의 부동산업체들은 호텔 주변에 골프장을 개발하기 위해 하와이의 땅을 매입했다. 고가의 어느 호텔 물건은 매입 비용을 회수하려면 하룻밤 객실료로 800달러나 매겨야 했을 정도다. 도쿄의 호황이 끝났을 때 하와이는 장기간의 경제 침체 - 잃어버린 10년 -에 들어갔다.

1618년에 발발한 30년전쟁의 전비 마련등을 목적으로, 보다 많은 화폐발행이익을 남기기 위해 영주, 대수도원장, 대주교, 심지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기존 주화의 액면단위 인상, 양질 금속의 표준 교체, 주화의 금속함량 축소 등의 방법을 써서 일상적인 거래에서 사용되는 보조 주화의 금속함량(화폐가치)를 저하시켰다.

마치 모든 정신병자들이 광기의 집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간 뒤의 광경이라고밖에는 증권거래소 현장을 묘사할 수 없을것 같다.

네덜란드 은행들은 선지급금의 회수, 추가 신용의 거부, 담보로 잡은 주식의 처분에 들어감으로써 그동안 펼쳐둔 돛을 거두어 들였다.

전쟁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1759년 은화 가치를 떨어뜨렸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기존 주화를 환수하고 네덜란드 은행가들의 신용을 기초로 새 주화를 암스테르담에서 주조했을 때, 치명적인 최후의 일격이 시장을 강타했다. 새 주화를 방출하기 전에 실시된 구 주화의 환수가 통화 공급량을 축소시킴에 따라 디플레이션 압력이 신용을 짓눌렀다.

해먼드는 18세기의 사업 세계가 가지고 있던 건전한 행보는 빨리 부유해지려고 하는 대중적인 열정에 굴복했고, 이 열정과 함께 부도덕성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제 2차 합중국은행의 경영을 장악했다고 기술했다.

영국의 투기는 면화, 면직물, 철도에 집중됐고, 미국의 투기는 면화와 토지, 특히 면화 재배가 가능한 토지에 집중됐다.

파산 은행과 기업의 자산 가치는 아니지만, 파산 건수를 집계한 에반스의 기록에서 위기의 확산 사태를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월간 파산 건수를 집계한 표는 위기의 충격파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실감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국제수지 흑자는 은으로 지불되었다가, 새로 채굴된 금으로 전환되어 유럽에 축적됐다.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철도 건설과 은행업이 팽창했다.

영국의 곡물법, 목재 관세, 항해 조례가 폐지됨에 따라 특히 스칸디나비아의 무역이 크게 늘어났다.

세계는 하나다. 산업과 무역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배상금 지불에 따른 통화량 축소로 디플레이션 압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여타 유럽 지역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많은 신설 회사들의 파산으로 1905년 5월부터 불안 국면이 시작됐다. 1907년은 4~5월이 되자 파리와 런던으로부터의 자금 대여가 둔화되면서 불안 국면은 더욱 첨예해졌다.

후버 대통령은 대공황의 실제적 요인 가운데 상상 부분은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 이외 지역의 생산 확대 - 유럽의 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한 해인 1925년의 물가를 기준으로 할 때 과잉생산임이 드러난다 - 라고 언급했다.

미국의 국내 사정으로는 금리 인상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과대평가된 영국 파운드화의 금 평가를 영국이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1927년 여름에 취해진 뉴욕의 금리 인하에 책임을 돌리는 주장도 있다.

누적된 단기채무를 해소할 자금을 마련할 길도, 추가적인 차입을 추진할 길도 막힌 상태에서, 밀, 커피, 고무, 설탕, 비단, 면화 등 이들 나라의 주요 상품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1929년 10월 주식시장 붕괴 직후에 이들 나라 통화의 외환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로 구성된 금 블록 국가들이 미 달러화 보유액을 금으로 환전하고, 미국에서 금을 회수하기 시작함에 따라 미국 은행들의 금 준비금이 줄어들었다. 미국에서의 디플레이션은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 상승 그리고 은행 준비금의 감소에 따른 것이었다.

세계의 거의 절반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위기는 태국이 대외채무의 지불불능을 선언한 1997년 7월 2일이 그 시작이었다.

이 호랑이들 사이에 벌어진 군중행동의 형태는 해외 통화의 대규모 차입, 투기적인 부동산 투자, 그리고 국내 물가의 상승 요인과 함께 통화가치의 과대평가를 유발한 미 달러화에 대한 환율 고정으로 나타났다.

홍콩 당국은 건설 대출의 상한선을 낮추는 방법 - 1990년대 초반 90%에서 1990년대 중반 60%로 낮추는 규제 강화 - 으로 금리에 대한 통제를 견지함으로써 은행의 부동산담보 대출에서 대형 손실을 유발하지 않고도 금리를 높일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위기가 러시아와 브라질로 확산된 것은 이들 나라 역시 거액의 채무를 안고 있고, 통화가 과대평가돼 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는 정부가 눈에 띄게 부패해 있다는 점에 대한 금융시장의 인식이 불러온 상당 부분 심리적인 사태 전개였다.

20세기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발생한 서로 다른 4개의 자산가격 거품 가운데 최초의 것은 1980년대 후반 도쿄의 부동산과 주식 거품이었고, 두번째는 거의 같은 시기에 벌어진 노르딕 3개국(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부동산과 주식 거품이었다. 세번째 거품은 1990년대 중반 방콕,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 홍콩과 인근의 각국 금융 중심지에서 형성되었고, 네번째 거품은 1990년대 후반 특히 나스닥시장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주식거품이었다.

선진 산업국가에서 자산가격 거품은 드문일이다. 미국에서 있었던 직전의 거품은 1920년대 말이었다.

이 자산가격 거품들은 체계적인 상호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딕 국가에서의 거품은 도쿄와 오사카에 본부를 둔 은행들의 역외 지점에서 제공된 대출의 급증이 원인이었다. 이 때 동시에 겹치게 된 두 가지 사태 중 하나는 일본의 은행감독 당국이 일본 은행들의 해외사업 규제를 완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르딕 국가들의 감독 당국이 국내 은행들의 해외차입 규제를 완화한 것이었다. 런던과 취리히, 그리고 역외금융 중심지 소재 일본 은행들의 지사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대출 자금이 노르딕 국가의 차입자들에게 들어갔고,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급등을 유발했다. 태국과 여타 아시아 국가의 거품은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 붕괴이후 수년 동안 도쿄로부터 유입된 자금에 의해 형성되었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및 그 이웃 국가들의 거품이 1997년 하반기에 붕괴하고, 이 붕괴로 인해 아시아 국가를 이탈하는 자금이 미국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1990년대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미국의 주식거품이 더욱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이들 자산가격 거품 사이의 연결 고리는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과 일본의 경쟁력 하락을 가져온 일본의 거품이 붕괴하고 나서, 방콕과 여타 아시아 국가를 향해 도쿄로 부터 밀려 나온 자금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생산원가의 경감을 위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생산을 외주 조달하기 시작했다.

중국 위안화와 홍콩 달러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 통화 대부분의 외환가치가 급격히 하락했고, 이에 따라 이들 나라의 무역수지가 빠르게 흑자 전환했다.

해외 거주자들에게 유가증권을 매도한 미국 거주자들은 그 매도 대금의 매우 큰 비중을 다른 미국 거주자가 보유한 다른 유가증권을 매수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유가증권을 매도한 미국 거주자들 역시 그들의 매도 대금 대부분을 다시 다른 미국 거주자들로부터 다른 유가증권을 매수하는 데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유가증권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자금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는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며,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와 자금이 이탈하는 나라 모두에서 자동적인 조정이 일어난다. 자본 유입 국가에 일어나는 하나의 조정은 외환시장에서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이고, 또 다른 조정은 거의 예외 없이 자산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은 경제 호황을 동반하며 증가하는 것이 다반사다.

가계의 부가 증가하면 소비의 증가가 유발되거나, 혹은 똑같은 것이지만 - 자산가격의 상승은 저축 목표를 달성하는 가계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 저축률의 하락이 유발된다.

이와 같이 아시아 국가들의 수도에서 형성된 자산가격 거품은 1990년대 초 도쿄의 자산가격 거품 붕괴,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유출 급증에 뒤따라 팽창했다.

도쿄로부터 태국, 인도네시아 및 여타 아시아 국가로 흘러들어간 자금은 통화가치가 변동환율제에 따라 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나라에서는 해당 통화의 외환가치 상승을 초래했고, 자본 유입국의 환율이 고정된 경우에는 대외 준비자산 보유액의 증가와 통화 공급량의 증가를 초래했다.

오버슈팅이란 용어는 어느 나라의 통화의 외환가치가 국내 물가상승률과 주요 교역상대국의 물가상승률 차이에서 산출되는 가치에 비해 상승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 언더슈팅은 실질 외환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흐름의 규모가 한기간에서 다른 기간 사이에 변동하는 데 따른 불가피한 반응이다.

일본, 태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자산가격 거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유사성은 시장 참여자들이 최근의 가격 상승에서 나타난 추세를 미래 시점으로 비례 배분하는 방식에 의해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을 예측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은 이들의 수익 창출 능력 - 업무용 빌딩의 가격은 그 건물의 임대소득을 토대로 추산되고, 소니와 제네럴 일레트릭의 주가는 이들 회사의 기대 수익률을 반영한다 - 에 기초한다.

경우에 따라 일부 투자자들은 이 자산가격의 최근 상승 추이를 비례 적용해 미래의 주가와 부동산가격을 추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투자자들 - 이들은 어떤 때는 주가 관찰자, 어느 경우에는 모멘텀 투자자 혹은 데이트레이더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 은 개별 유가증권들의 최근 가격 변화를 가까운 미래 시점의 가격 예측을 위한 기준 비율로 활용한다.

현재 및 미래 임대소득이 부동산가격을 산정하는 기본적인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고, 기업의 기대수익률은 주가 산정의 기준 역할을 상실했다. 대신 최근의 가격 상승 추이를 기준으로 한 미래 가격 추정치가 부동산가격과 주가 산정의 기초가 됐다. 마치 월요일에서 화요일까지의 가격 상승이 금요일의 가격 수준을 예측하기 위해 수요일에 활용되는 양상이다.

부동산과 주식에서 형성된 일본과 아시아 국가의 자산가격 거품은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주가를 견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반면 미국의 경우 실리콘밸리와 금융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거나 혹은 가계의 부가 급증한 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여러 도시에서 부동산가격이 급등하기는 했지만, 거품은 거의 전적으로 주식에 집중됐다. 아시아 국가들의 거품은 일본의 거품과 유사했고, 이것은 주식이 국가의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에 비해 훨씬 작다는 점을 반영한다.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은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일본 황궁이 들어서 있는 대지의 시장가치가 캘리포니아 전체의 부동산 가치보다 크다는 것이 1980년대 말 도쿄의 이야기거리가 될 정도였다. 캘리포니아의 토지 면적은 일본 황궁 대지 면적의 수십억 배에 달하는데, 그만큼 단위 당 토지 가격의 엄청난 차이를 말해 주는 것이다. 황궁 부지에 대해 경매나 그와 유사한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비교를 처움으로 산출한 분석가는 됴쿄에서 땅 값이 가장 비싼 지역인 인근 긴자 유흥가에서 최근 거래된 작은 면적의 헥타르 당 땅 값에 100여 헥타르를 곱하는 방법으로 황궁 대지의 땅값을 추정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부동산의 가치는 미국 가계 자산에 대한 연방준비응행의 자료가 이용됐다.

됴쿄의 금융자산 가치 총액은 1980년대 말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미국 GDP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일본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미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의 두배에 달했다.

일본의 육지 면적이 미국의 5%에 불과하고 일본에서 육지의 80%가 산악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동상 시장가치는 미국의 부동산 시장가치의 두배에 달했다. 일본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60~70%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인구 일인당 토지의 시장가치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일본은 미국의 4배를 초과하는 수준이었다.

이 시기에 세계 10대 은행의 7개가 일본 은행들일 정도로 일본의 은행들은 자산과 예금 규모 면에서(그러나 이익에서는 아니었다) 세계 은행 순위표의 선두에 달렸다. 앞의 사례들과 유사하게 일본 최대의 투자은행인 노무라의 자본금은 미국의 5대 투자은행의 자본금 총액보다도 컸다.

미쓰이부동산은 기네스북에 등재되고 싶은 마음에 호가가 3억 1000만 달러였던 뉴욕시 6번가의 엑손빌딩을 6억 2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매있했다. 다른 일본 기업들도 미국의 기념비적인 부동산과 건물들을 취득했다.

일본의 소비지출이 급증했다. 일본인들은 또 소더비와 크리스티를 비롯한 예술작품 경매회사가 개최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작품의 경매에 참여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빈센트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화는 오사카 지역의 경마회사 사장에게 단일 예술작품 가격으로는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 골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창했다. 일본에서 땅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골프클럽 회원권 역시 비쌌다.

일본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19세기 후반에 산업화를 시작했다. 일본 천황은 미국, 독일, 영국, 벨기에, 그리고 서구의 여러 나라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해 정부와 공공서비스, 은행 시스템, 중앙은행, 그리고 경제 전반을 일본이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그 모델들을 배워오도록 했다. 도쿄의 중앙 기차역은 암스테르담 센트럴 스테이션을 모델로 삼았고, 일본은행은 벨기에 국립은행 모델에 기초한 것이었고, 공공서비스는 프랑스의 모델을 따랐고, 도로와 철도 시스템은 영국모델의 유형을 채용했다. (일본인들이 영국처럼 도로의 왼편에서 운전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산업경제는 봉건 가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그래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같은 고전적인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은행, 상사, 제조업체의 일부에 남아 있다. 이 가문들 각각은 하나의 은행지주회사가 상사, 조선소, 제철소 등 계열회사의 지분을 대량으로 소유하면서 이들에게 장기자본 출자와 단기대출을 통해 운영자본을 공급해주는 체제였다. 이처럼 산하 기업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기업집단, 즉 재벌을 형성했으며, 이는 독일식 모델과 다소 유사한 것이다.

이들 은행지주회사는 1940년대 말 히로히토 천황 대신 최고 통치권자로 등장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 의해 불법으로 금지됐다. 기업집단들은 상호출자라는 유형을 만들어 이에 대응했다. 각 기업집단은 집단 내 기업들이 서로 보호하고 밀어주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자금과 지휘력을 제공했고, 신기술 개발을 위해 설립된 회사에게는 시장까지 제공해주었다. 미쓰이중공업은 미쓰이철강으로부터는 철강을, 미쓰이보험으로부터는 보험상품을 매입하는 식이었다.

1945년 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40여년간 일본이 달성한 경제적 성과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수출품들은 조악한 품질에다 미국과 유럽 기업의 디자인과 기술을 도용한 것이어서 경멸적인 조소를 받았다.

일본은 1950~1960년대에 걸쳐 따라붙기 시작했고, 연간 10%를 초과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칸의 산술은 단순명료하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미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기타 산업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매년 2~4% 상회한다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일본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 나라들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하리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 일본은 제2위의 선도적 산업 열강으로 부상했고, 독일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지니게 되었다. 도요타, 닛산, 혼다는 세계 자동차 산업의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소니, 마쓰시타, 샤프를 비롯해 거의 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많은 기업들이 세계 전자 산업을 장악했다. 니콘과 캐논은 세계의 사진광학 산업을 아예 소유했다.

일본의 복잡한 규제 절차로 인해 해외 기업들은 일본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거나 일본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어려웠다.

일본인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제조된 스키가 일본의 눈에는 적합하지 안고, 일본인들의 위장은 캘리포니아에서 수확한 쌀을 소화시킬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장성의 고위 관료들은 은행의 예금금리와 대출금리 모두 금리 상한선을 낮게 유지했다. 예금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낮았기 때문에 가계는 그들의 재산이 줄어들지 않게 하려면 소득의 큰 비중을 저축해야 했다. 이렇게 낮은 금리에서는 기업들의 자금대출 수요가 자금 공급을 훨씬 초과하기 마련이었고, 이때 정부 관료들은 혜택을 주어야 할 기업을 선정해 은행들에게 창문 너머로 지시를 내렸다.

광범위한 금융 규제가 낳은 한 결과는 은행예금과 유가증권들 대부분의 실질 수익률이 마이너스라는 것이었다. 한가지 예외는 부동산이었는데, 부동산의 실질 수익률은 플러스였고 높았다. 또 다른 예외는 주식이었는데, 주식의 실질 수익률도 플러스였고 높았다.

일본인들의 미국 부동산 매입이 급증했다.

금융 자유화를 통해 은행들은 부동산을 매수하거나 신규로 업무용 빌딩이나 주거용 건물, 쇼핑센터를 건설하려고 하는 차입자들에게 대출을 늘려줄 수 있게 됐다. 부동산 대출에 쓸 수 있는 자금의 증가로 인해 부동산 가격은 더욱 빠르게 상승했다. 부동산 사업에 관련된 회사들은 도쿄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은 초고층 빌딩들의 건설과 함께 건설 경기의 확대로 이어졌다. 일본 은행들은 거액의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동산과 주식가치의 상승으로 인한 은행 자본의 증식이 그들의 영업이익보다 훨씬 컷다. 자본이 증식됨에 따라 은행들은 대출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일본은 금융세계의 영구작동 기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였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주가의 상승을 낳았고,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은 은행자본의 증식을 낳았다. 은행자본의 증식에 따라 은행들은 대출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게 되었고, 예전에는 차입 한도의 규제를 받던 그룹들에게도 금융 자유화 덕택에 대출을 늘려주기가 더욱 용이해졌다. 대부분의 은행 대출에는 부동산이 담보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계속 상승하는 한, 은행의 대출손실은 극히 작은 것이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에 따라 부동산에 투자한 기업의 이익이 늘어났고, 따라서 많은 기업들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차입을 늘렸다.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의 생산으로 얻는 수익률보다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에 따른 수익률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부동산과 다른 회사 주식의 매수에 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차입하기 시작했다.

거품 국면으로 진입하기 전에 이미 자산가격의 상승이 빠르게 진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산가격 거품의 발단 시기를 정하는 것은 항상 복합적인 문제다. 일본에서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률은 일본 엔화의 외환가치가 급속히 상승하기 시작한 무렵인 1985년에 가속화됐다.

일본 부동산가격의 거품은 세가지 요인에서 비롯됐다. 하나는 30년이 넘도록 다른 대부분의 유가증권이 마이너스 실질 수익률을 보일 때, 부동산의 실질 수익률은 플러스였다는 점이다. 금융계의 대표적인 속설 가운데 하나는 땅은 좋은 투자대상이다. 땅값은 항상 오른다는 것이고, 이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속설은 땅은 좋은 투자 대상이다. 땅은 당장 더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두가지 속설을 다 믿었고, 1940년대 말부터 이어진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그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

두번째 요인은 부동산을 매수하려는 차입자에 대한 일본 은행들의 대출을 제한하던 이전의 금융규제가 자유화됐ㅁ다는 점이다. 이로써 은행들은 자유롭게 대출 총액에서 부동산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부동산 투자자들은 더 고층으로 지을 수 있었고, 1980년대 말에는 전세계 건설용 타워크레인의 절반이 도쿄에 있는 듯 했다. 부동산 투자자들이 사기 어려운 땅은 농지밖에 없었다.

세번째 요인은 1980년대 후반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을 제한하기 위한 일본은행의 시장개입이 초래한 통화 공급량의 급성장이었다. 1980년대 전반 일본 엔화의 외환가치는 미 달러화에 대해 급속히 하락했다. 이로 인해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 세계시장에서 크게 향상됐다. 1980년대 후반에는 엔화의 외환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전반에 집행된 설비투자의 가치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행은 엔화 외환가치의 상승을 제한하고 완화시키려고 했다. 대대적인 시장 개입의 결과 일본의 통화 공급량이 이례적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즉, 본원통화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 은행들의 준비금 증가는 이들의 중앙은행 예치 준비금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들 은행이 대출을 빠르게 확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었다.

은행은 자금을 빌려줄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기업과 투자자들은 의욕적으로 자금을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이 지속됐다. 부동산 가격이 연간 30%의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일본 기업들은 수익성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본 은행들은 거액의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상승하는 동안 은행 자본은 증식됐다. 은행 자본이 늘어나자 그들의 대출 능력도 확대됐다. 차입자들은 부동산 매입을 늘렸다. 그러나 부동산의 공급은 매우 느리게 증가했기 때문에, 부동산 매수세의 확대는 부동산가격의 상승을 더욱 부채질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은 주가의 상승도 유발했다.

주가의 급등은 기업들이 매우 적은 비용으로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의 혁신은 전환사채의 개발이었다. 기업들은 매우 낮은 금리와 함께 지정된 가격에 주식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채권을 판매했다. 이 채권은 사실상 주식을 살 수 있는 콜옵션과 유사하면서, 동시에 주식 배당보다 높은 금리가 이 채권의 소유자에게 주어졌다. 기업이 이 채권을 발행해서 얻은 현그을 사용하는 세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 자금을 은행계좌에 예치해 기업이 지불하는 이 채권 금리의 2~3배에 달하는 예금금리를 벌 수 있었고, 이 자금으로 주식을 살수도 있었으며, 생산능력 확대와 제품 생산라인의 향상을 위해 시설과 장비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일본의 관행에서는 대출에 부동산 담보가 설정됐고, 전통적으로 은행은 부동산 담보 가치의 70%까지 자금을 대여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률이 연 30%의 속도로 진행된 덕분에 감정인이 부동산에 너무 높은 가치를 매김으로써 발생하는 웬만한 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 가격으로 실현되므로 시장에 의해 저절로 교정됐다.

부동산가격이 임대료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함에 따라 임대수익률이 차입자금에 대한 금리 밑으로 크게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1980년대 마지막 수년 동안 부동산을 매수한 투자자들은 마이너스 현금흐름 - 부동산 관리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임대소득이 갚아야 할 이자지급액보다 작아지는 - 상태에 빠졌지만, 부동산가격이 매우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담보 가치가 상승한 부동산으로 차입금을 늘리거나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이자 지급을 위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 주식의 시장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미국과 서유럽의 투자자들은 더 많은 일본 주식을 매수했다. 글로벌 인덱스펀드는 일본 주식을 보유하고자 했다. 일본 기업의 주식을 매수한 비일본인 투자자들은 주가 상승의 효과에다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높은 수익률을 얻었다.

일본의 거품은 1989년 말 점차 강화되는 국면에 도달했다. 부동산가격이 너무 높아 보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된 바 있는 너무 비싸서 아무도 거기에 거주할 엄두를 낼 수 없다는 야구 스타 요기 베라의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은행들은 100년, 3세대나 이어지는 부동산저당증서를 개발했다. 신임 일본은행 총재는 너무 높은 주택 가격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것을 우려했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대출총액 증가율을 초과할 수 없도록 부동산 대출의 증가를 제한하는 새로운 규정이 도입됐다.

일단 은행 대출의 증가율이 둔화되자, 최근에 부동산을 매입한 일부 매수자들이 현금 동결 상태에 빠졌다. 이들의 임대소득은 부동산담보 차입 이자에 여전히 모자랐지만, 예전처럼 채무잔고의 이자를 지불하는데 필요한 현금을 신규 은행대출로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투자자들 가운데 높은 유지비용으로 인해 보유 부동산의 투매자로 변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부동산 신용 성장률의 급락에 따른 신규 매수세의 실종과 동시에 이들 투매 물량이 시장에 쏟아져 나옴으로써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땅값은 항상 오른다는 속설이 비로소 시험대에 올랐고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다.

1990년 초부터 주가와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주가는 30% 하락한 데 이어, 1991년에 다시 30% 하락했다. 일본의 주가 추세는 네번의 가시적인 반등 국면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하락 방향으로 기울었다. 비록 실물경제는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커졌지만, 일본의 주가는 2003년 초에 20년전과 똑같은 수준으로 돌아갔다. 실질 경제성장랼은 평균적으로 1%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1999년 소비자물가 수준이 연 1~2% 하락하기 시작했고, 물가하락이 대대적인 파산으로 이어지면서 이로 인한 은행의 대규모 대출손실과 자산의 투매가 다시 물가 하락을 야기하는 고전적인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겼다.

이제 영구작동 기계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동산의 매도가 부동산가격의 하락을 초래했다.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떨어진다는 것은 은행 자본이 계속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은행은 자금을 대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었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식가치가 상승하는 시기에 일본 주식의 가치 하락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글로벌 인덱스펀드들은 일본 주식을 매도하고 미국 주식을 매수했다.

화폐경제학에서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잡은 사실은 자산가격 거품의 붕괴가 디플레이션, 즉 경기순환의 확장 국면에서 진행된 경제 호황의 반대 과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비용의 급증과 함께 예상 이익성장률의 하방 수정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 국면중의 과다한 투자지출이 남긴 설비 과잉으로 인해 투자지출이 감소했다. 수백만 가정은 주가와 부동산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부의 축소를 상쇄하기 위해 벌어들인 소득에서 저축하는 비중을 늘렸고, 이에 따라 가계 지출은 예전에 비해 훨씬 느린 속도로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파산이 늘어났고, 은행 및 여타 금융기관들은 대규모 대출손실을 입었다. 부동산 대출에 특화된 비은행 금융기가ㅗ들은 엄청난 어려움에 빠졌다.

엄청난 파산 건수와 은행이 입은 거액의 대출손실에도 불구하고 입본의 예금자들은 그들의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 비록 공식적인 예금보험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예금자들을 보전해 줄 것이라고 개인과 기업 둘 다 확신했다. 대출 자산의 시장가치가 예금부채보다 적어서 은행의 순자산이 마이너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은행 주식의 가격이 영보다 큰 값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은행들은 너무 커서 망할 수 없다는 투자자들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제 다수의 은행들이 신규 대출에 대해 극도로 신중해졌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보수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해왔던 부동산 담보 설정이 실은 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은행들은 우리가 이 자금을 대출해준다면 상환이 이루어질 확률은 얼마인가? 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묻기 시작했다. 예전에 없었던 은행의 콧대 높은 자세로 인해 차입자들은 이 신규 투자가 과연 수익성이 있을 것인가? 또 우리의 시장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본 프리미엄의 증가는 위험에 민감한 투자자들에게는 경고 신호였다.

1991년 일본의 경기 후퇴는 수출은 급증하는 반면 수입 증가율은 현격하게 둔화됨을 의미했다. 일본 기업의 공급능력이 늘어난 것에 비해 국내시장의 성장은 정체되고 있었으므로 몇몇 일본 기업들은 수출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수입 증가세의 둔화와 수출의 급증은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역수지 흑자의 증가가 일본을 떠나는 자본유출의 증가보다 컸으므로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이 야기됐고, 이는 수출 지향적인 일본 기업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다수의 기업이 보다 저렴한 노동비용을 활용하기 위해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에 투자를 확대했다.

1992년 세계은행은 태국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의 경제적 성과를 웅장하게 묘사하는 제목의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서적을 발간했다. 이 나라들의 GDP 성장은 몇가지 측면에서 일본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이룩한 성과에 견줄만 한 것이었다. 1950년대 초 전쟁을 겪은 후, 한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괄목할만한 경제성장 시대를 열었다. 싱가포르는 1950년대 요새화된 늪에서 1990년대 이르러서는 세계 일류의 생활수준을 달성했다. 마어쩌둥으로부터 1978년 덩샤오핑에 이르는 중국의 정치적 통솔력 변화는 자력갱생을 주창하던 고립된 나라에서 국제교역과 투자에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나라로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중국의 연간 성장률은 20년 넘게 평균 10%에 육박했고, 해안에 인접한 성과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주요 도시의 경제성장은 훨씬 더 극적인 수준이었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주가는 1990년대 전반 300~500% 상승했고, 제조업 생산이 급증했다. 1993년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가는 두배로 올랐고, 1994년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부동산가격이 폭등했다. 경제는 호황 가도를 달렸다.

중국, 태국 및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성숙한 내수시장용으로 보다 저렴한 공급처를 원하는 미국, 일본, 유럽 기업들의 외주생산기지였다. 빠른 경제성장은 외국 자본(특히 일본 자본) 유입의 결과이자 이유였다. 당초 일본의 투자는 보다 저렴한 노동비용을 활용하기 위해 제조공장을 건설하는 형태를 취했다. 고부가가치 부품은 일본에서 생산된 후 같은 계열의 해외 공장으로 선적돼 그곳에서 조립되었다.

그러던 중 1996년 겨울 태국의 소비자금융회사들 - 대다수는 소비자 대출을 제한하는 규제를 피해 가기 위해 태국의 대형 은행들이 설립한 것이다 - 에서 대형 대출손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태국의 차입자들에게 빌려준 대출의 가치에 대한 외국인 대여자들의 우려가 증폭되었고, 이어서 태국으로 들어오는 해외자금 유입액이 감소했다. 태국 중안은행이 바트화의 당시 환율을 지탱할 수 있는 여력은 순식간에 소진돼 1997년 7월 초 바트화의 외환가치는 급락했다.

바트화의 외환가치 하락은 전염 효과를 촉발해 6개월만에 중국 위안화와 홍콩 달러를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통화는 외환시장에서 30%,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상실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 회수로 인한 수급 요인과 국내 기업의 수익성 악화라는 실물 요인이 겹쳐져 주가는 30~60% 폭락했다. 부동산가격이 폭락했다. 싱가포르와 홍콩 소재 은행들을 제외한 상당수의 은행들이 파산했다.

위기가 터지자 앞서 일본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건들이 연극대본처럼 재연됐다.

이들 나라 통화의 급격한 외환가치 하락은 미 달러화나 일본 엔화, 혹은 다른 외국 통화로 차입한 기업들에게 큰 손실을 초래했다. 많은 수의 아시아 국가 은행들이 은행 자신의 외화평가손실과 함께 은행에서 자금을 차입한 기업들의 손실로 인해 파산 상태에 빠졌다. 또한 통화가치 하락은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수지를 거액의 적자에서 거액의 흑자로 빠르게 반전시켰다.

아시아 각국의 무역수지와 경상수지에서 나타난 거대한 역전 파동은 그 반대편에서 미국 무역수지의 적자 확대와 맞물려 일어난 것이다. 사실상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 상승은 태국 바트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그리고 여타 아시아 통화(미 달러화에 환율이 고정된 중국 위안화와 홍콩 달러화를 제외한)의 외환가치 하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82년에서 1999년 사이에 미국의 주가는 13배의 상승을 시현했다. 미합중국의 200년 역사상 연간 상승률로는 가장 괄목할 만한 상승 행진이었다.

미국 주식의 시가총액은 1982년 미국 GDP의 60%에서 1999년에는 GDP의 300%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일인당 국민소득 수준이나 피고용 인구가 대폭적으로 증가한 지역 - 실리콘밸리와 샌프란시스코 만 광영권, 워싱턴 시, 보스턴, 뉴욕 등 - 에서 상당한 수준의 부동산가격 상승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의 부동산가격 상승은 나라 전체적으로는 미미했다.

미국 경제는 1990년대 내내 호황기를 구가했다. 물가상승률은 1990년대 초 6%를 상회하는 수준에서 1990년대 말 2% 아래로 하락했고, 실업률은 8%에서 4% 밑으로 떨어졌으며, 경제성장률은 2.5%에서 3.5%로 상승했다.

미국의 경제적 성과 면에서 나타난 부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는 연간 무역수지 적자가 5000억 달러로 급증했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가계의 저축률이 새로운 저점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이 호황 국면에서 나타난 현격한 특징은 신경제의 부상, 특히 정보기술, 컴퓨터, 닷컴 그리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기업과 이 기술의 발전을 전통적인 필요에 활용하는 기업들의 부상이었다. 이 같은 기술발전은 정보의 전달 및 보관 비용의 대폭적인 감소를 가져왔다.

컴퓨터를 통해 극히 낮은 비용으로 투자자들이 주식을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회사들이 설립됐다. 데이트레이더들이 출현했다.

99.46%의 경우에서 해당 주식의 최초 거래일 종가는 IPO 가격(공모가격)을 크게 상회했기 때문에, 이 가격으로 주식을 매수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은 큰 자본이득을 실현했다.

이 같은 가격 뻥튀기의 한가지 효과는 공모가격으로 주식을 매수하려고 아우성치는 투자자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것이었다. 두번째 효과는 그런 매수세가 과시됨에 따라 이 연출 과정의 한 꼭지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는 것이다.

창업자들은 성공적인 혁신으로 그들이 벌어들일 수 있는 막대한 부에 매료됐고, 벤처자본가들은 성공확률이 높은 기업가들을 찾아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에 매료됐고, 투자은행가들은 일반투자자에게 다수의 기업을 공개해서 얻은 수수료를 원했다. 그리고 투자자들은 공모가격과 이 주식의 첫 거래일 종가, 첫 거래주간 종가, 첫 거래월 종가 간의 주가 뻥튀기에서 얻는 큰 자본이득을 원했다.

투자은행가들은 주식 보유자들이 매도할 때 얻는 현금을 최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첫 거래일의 가격 뻥튀기를 최대화하기 위해 공모가격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뻥튀기 폭이 커질수록 - 적어도 당분간은 - 주식 매수세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창업자들은 기업공개 시점에 그들의 주식 총량에서 작은 부분만을 매각했다. 뻥튀기 폭이 클수록 주식 잔여 물량을 포함한 부의 총액이 커진다는게 이들의 계산이었기 때문이다.

IPO 직후의 추기 거래기간에는 주식 거래량이 기업공개 때 판매된 주식 수량의 세배나 네배에 달하는 날들도 있었다.

미국에도 수십 만 가정의 재산을 불리도록 설계된 그 나름의 영구작동 기계가 생긴것 처럼 보였다. 첫 거래일의 가격 뻥튀기가 클수록 IPO에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IPO에 대한 수요가 강할수록 창업자들을 밀어주려는 벤처자본가들의 수가 늘었다. 창업자들이 이 작업에 투입하려는 자본이 커질수록 기존 기업에서 이탈해 그들 자신의 운명을 모색하려는 창업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2000년 초 다우존스 산업평균 주가는 11700, 나스닥 지수는 5400이었고, 나스닥 주식의 시가총액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주식 시가총액의 80%에 달했다.

합리적 활력이 언제 비이성적 과열로 변이를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은 없다. 미국의 주식에 자산가격 거품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서로 다른 날에 서로 다른 투자자들에게 생겼다.

두번째 측면은 FRB가 통화정책을 완환해 1994년의 긴축정책이 반전됐다는 점이다.

거품시작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점은 1998년 여름이다. 당시 다수의 미국 헤지펀드 가운데 가장 전문적이고 세련됐다는 평가를 듣던 LTCM의 위기에 따른 금융 질서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가 부분적인 이유로 작용해 FRB가 재차 통화정책을 완화했다.

1998년 6월부터 12개월 동안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은 9조 50억 달러에서 12조 6710억 달러로 40%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나스닥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 7770억 달러에서 3조 2090억 달러로 90% 증가했다.

1999년 내내 FRB, 은행 그리고 나라 전체가 Y2K 문제 - 일부 컴퓨터가 2000년 날짜 전환에 실패하는 일로 말미암아 경제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신경질환 - 로 골머리를 앓았다. FRB의 예방조치가 은행 유동성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다시 한번 은행들이 유동성 증가에 대응해 여신을 확대했다.

주가 상승이 유럽 투자자들을 유인함에 따라 유로화에 대한 미 달러화 외환가치가 상승했다. 미 달러화의 실질 외환가치 상승과 무역적자의 급증으로 인해 미국의 물가상승 압력이 약화됐다. 이에 따라 FRB는 좀더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채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새로운 천년의 도래와 함께 FRB는 유동성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식시장 전체의 하락 규모는 40% 였고, 나스닥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은 80%나 줄어들었다.

15년 동안 세번ㅇ 자산가격 거품이 진행된 것 - 1980년대 후반의 일본, 1990년대 전반의 태국과 말레이시아 이어서 1990년대 후반의 미국 - 은 통화금융 측면에서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일본의 거품은 30년간 진행된 부동산가격의 급상승, 일본 은행들의 부동산 대출 확대를 가능하게 만든 금융 규제의 자유화, 엔화의 외환가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일본 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에 따른 본원통화량의 급증으로 발생했다. 일본의 거품이 붕괴하자 일본으로부터 태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로 유입되는 자금 흐름이 급증했고, 이들 나라의 부동산과 주가가 -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에서처럼 급격하게 - 상승했으며, 이들 나라의 경제는 일본 경제가 1980년대 호황을 누린 것과 똑같이 호황기에 들어섰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거품이 팽창하고 나서 이 자금이 미국으로 밀려 들어감에 따라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상승했고, 미국 주가는 1920년대 거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자산가격 거품으로 팽창했다.

성장률이 상승했는데도 물가상승률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는데, 이것은 통화의 외환가치 상승이 가져온 수입상품의 가격 하락이 국내 물가의 상승 압력을 약화시킨 덕분이었다.

이 일화들 각각에서 등장한 현금흐름의 유형은 폰지금융과 유사했다.

즉, 1980년대 일보의 부동산 투자자들은 자금을 빌린 은행에 갚아야 할 이자 지불액 전부를 은행으로부터 신규 차입의 형태로 마련했다. 이런 현금흐름의 유형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유지되지 못했다. 태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거액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었고 국제적 채무국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들 나라는 대외채무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그들의 대여자로부터 신규 차입의 형태로 확보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주식 매수자들은 보유 주식을 되팔 수 있도록 매도 대상이 되어줄 더 대단한 바보들이 많이 공급될 것이라는 암묵적인 도박을 벌였다. 더 대단한 바보들은 존재했지만, 다른 때는 합리적이며 보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그 투자자들이 주가가 무너졌을 때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바보들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어느 자산가격의 거품이든 거품이 붕괴할 때면 반드시 부정과 사기가 발견된다.

엔론은 미국 주가가 고점을 기록한 뒤 수개월 만에 파산을 향한 추락을 시작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라는 파국을 빚게 된 재무회계상의 일부 오류에 대해 MCI 월드컴이 여러 차례에 공시하기 시작한 것도 거의 같은 시점이었다.

정크본드 시장은 1980년대말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고, 1987년 10월 주가가 폭락한 뒤 무너져 내렸다.

부패 발생 건수는 신용공급과 아주 유사하게 경기순환의 파동이 올라가면 함께 증가한다.

경기가 후퇴하면 대여자들은 개별 차입자들의 재무 상태와 자신들의 신용 노출에 대해 보다 신중해지므로, 곧이어 기업의 성장에 연료를 부어주던 대출이 감소한다. 신용이 늘어나지 않으면, 축축한 숲속에서 버섯이 자라나듯 부정이 피어 오른다.

대다수 부정 행위는 애당초 주가 상승이 진행되는 광기 국면에서 발생했던 것이지만, 거품의 포말 속에 가려졌다. 차입자들의 리스크는 높았지만 대여자들이 열정적으로 대출과 자산 규모를 늘리려 했던 덕분에, 만기가 도래한 대출금을 재차 조달할 수 있었다.

세계 5대 회계법인의 몇 곳은 그들의 회계감사를 맡은 기업체들 - 회계법인에게 수임료를 지불하는 회사들 - 에게 장악 당했고, 투자자들을 속이는 일을 함께 공모했다.

사기의 전통적인 형태로는 재고로 보유하고 있는 상품 가치의 과대 포장을 꼽을 수 있다.

월스트리트는 주식을 판매해 많은 돈을 벌고, 개별 기업 주가의 상승 효과를 발휘하는 투자보고서 발표를 그 주된 목표로 하는 일군의 고액 연봉 소득자들과 함께 번영을 누리는 곳이다. 이들은 축제가 열리면 관람객들이 표를 사서 칼을 삼키는 묘기를 구경하도록 만드는 바람잡이들과 비슷하다.

주가는 보통 통계적으로 한 번 떨어지면 두 번 오르기 때문에, 특별한 기술이 없더라도 시장전략가들은 틀릴 확률보다 맞은 확률이 더 높다. 시장전략가들은 주가지수가 하락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를 꺼려하는 게 전형적인 모습이고, 개별 종목에 대해서도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부패 행위는 거의 모든 경제에서 그 일부 요소다. 도덕적인 규범과 법률적 규범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거래 건수는 1990년대처럼 풍요로운 호황기에 증가한다. 역설적이지만 주가와 부동산가격, 상품가격이 서너해 동안 연 30~40%씩 상승하면서 개인적인 부가 증가할 때, 훨씬 더 빨리 부를 늘리고자 하는 개인들이 만들어 내는 부정행위의 증가가 유발되는 것 같다.

호황이 끝나고 손실이 명백해질때, 거꾸로 성공하기만 하면 당장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서 더 큰 도박을 시도하는 경향이 생긴다.

리슨이 속한 부서의 어느 담당자가 명백한 거래상의 오류를 저질러 리슨의 거래계정에 큰 손실이 발생했다. 리슨은 런던의 베어링 본사에 이 같은 오류를 보고하지 않았고, 닛케이 주가 풋옵션을 추가로 매도했다. 그의 계산은 풋옵션의 추가 매도로 버는 프리미엄 수입으로 거래오류로 인한 손실을 메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베 지지인 발생하면서 도쿄 주가가 폭락하자 그의 풋옵션 매도는 프리미엄 수입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야기했고, 거래계정의 손실은 더욱 불어났다. 이때 그는 거래규모를 두배로 늘렸다. 이렇게 늘어난 새로운 계약에서 수익을 얻은 뒤 이전의 손실들을 모두 만회하고, 해당 포지션을 청산해 버리면 본사에서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두번째 내기도 실패했다. 그의 신규 포지션이 손실을 보탤 때마다 이번에는 그가 성공할 차례라는 희망으로 매번 판돈으로 두배로 늘리는 두배 걸기를 했다. 이런 사태가 이어져 마침내 리슨의 거래계정에 누적된 손실은 베어링의 자본금 총액에 맞먹을 정도로 불어났다. 리슨은 아마도 4번 혹은 5번 연이어서 손실 거래를 반복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그가 다섯번 연속 실패하는 확률을 생각해보자. 다섯번 연속해서 동전의 앞 면이 나올 확률은 서른 두번의 경우의 수 가운데 한 번 뿐이다.

리슨, 루스낙, 호주의 트레이더들은 손실 거래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만회하지 못했다. 리슨이나 루스낙처럼 시작했다가, 두배 아니면 꽝 내기에서 두번 혹은 세번, 네번의 손실을 입고 나서, 운좋게 다음번에 성공한 불량 거래자들이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은행의 자본금은 이상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불법적인 부정행위는 발각되지 않은 채 지나갔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일본의 거품이 붕괴했을 때 도쿄와 오사카에 본점을 둔 대형 은행들은 거액의 손실을 입었고, 특히 부동산과 주식 매수 자금으로 대여한 대출에서 손실이 컸다. 또한 이들 은행이 지방의 다양한 신용 조합 - 이들도 부동산 대출을 제공했다 - 에 대여한 대출에서도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의 지방은행 가운데 일부는 더 큰 손실을 입었다. 이들이 대출해준 골프장, 호텔, 놀이공원 개발사업 가운데 다수는 주로 지역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됐다. 일본에서는 차입금을 반제해 청산하는 전통이 잘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차입자들은 대출잔고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신규 대출에서 얻은 현금을 사용했고, 따라서 대출잔고가 금리만큼의 속도로 늘어나는 관행이 생겼다. 이 같은 언제나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은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금리보다 서너 배 빠른 속도로 진행됐기 때문에 안전했다. 은행은 차입자에게 부동산을 대출 담보로 설정할 것을 요구했고, 부동산 평가가치의 약 70%를 대출 상한선으로 설정하는 것이 표준적인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계속되는 한, 담보가치도 상승할 것이므로 은행은 문제없이 보호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대출승인 과정에서 일어난 몇가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이 알려지게 됐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근 아시아 국가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고, 은행이 거액의 손실을 입게 되자 정실 자본주의 - 왕성한 경제성장의 초기 기간에 특정 차입자들에게 주어진 뚜렷하지 않은 우대조치 - 가 돌연 등장했다. 인도네시아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하르트 가문의 사업체 였고, 이 나라 국내총생산의 성장 덕분에 괄목할 만한 성공 사례로 평가됐다. 인도네시아가 잘 나가고 있을 때 은행들은 수하르트 대통령의 자제들이 이끄는 다수의 사업체에 기쁜 마음으로 자금을 대출해주었고, 이들 은행 가운데 일부는 사실 대통령의 자제들이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들 은행은 그들의 대출자금으로 추진될 프로젝트가 정말로 수익성이 있는가는 별 관심이 없었다.

1980년대 초 미국 금융계에서 끊임없이 등장한 머리기사 가운데 하나는 머지 않아 닥쳐올 신용금고와 상호저축은행 - 첫 주택 마련을 위한 자금조달 수단이 제한된 미국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저축기관들 - 의 재정 파탄이었다. 이들 저축기관은 만기가 단기인 예금계좌를 판매해 확보한 자금을 만기가 장기인 고정금리 부동산저당증서(모기지 채권)를 매수하는 데 사용했다. 예금부채의 만기가 모기지 채권의 만기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에 이들 저축기관은 장기금리에 비해 단기금리가 상승할 경우, 보유 채권에서 예금 금리 이상으로 버는 금리가산분이 감소하고, 심할 경우 마이너스 상태에 빠질 수 있는 전환 위험을 떠안은 셈이었다. 예금 수신을 위한 은행과 저축기관 간의 과도한 가격 경쟁을 제한하기 위해 미 정부당국이 단기 예금금리를 규제했기 때문에, 이들 저축기관은 50년 동안 별 탈 없이 전환 위험과 더불어 잘 지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미 달러화 표시 유가증권의 금리가 급등함에 따라, 저축기관들에게 허용된 금리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미 재무부 국채와 머니마켓펀드(MMF)를 매수하기 위해 다수의 개인들이 저축기관에서 자금을 인출해갔다.

저축기관들은 진퇴양난에 직면했다. 그들이 미 재무부 국채의 금리와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예금금리를 인상하면, 예금금리 지불액이 모기지 채권에서 버는 금리 수입보다 많아져 그들의 자본금은 차츰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이자 수입액 이상의 예금금리 지불액을 줄이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모기지 채권을 매도한다면, 채권 매도가격은 그들이 사들였던 매수가격보다 - 아마도 훨씬 - 낮을 것이므로 그 즉시 거액의 자본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을 것이었다. 대다수 저축기관들은 예금금리를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런 죽음보다 천천히 죽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저축기관들은 자기자본금의 월간 잠식률을 추정해 자본금이 전부 소진되는 날짜를 예측할 수 있었다.

수백개의 저축기관들이 파산했고, 이어서 수천개의 저축기관들이 파산했다.

초기에는 파산한 저축기관을 미 정부의 예금보험 보장기관인 연방저축융자보험공사(FSLIC)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인수했다. 이들 정부기관은 파산한 저축기관의 우량 채권을 다른 저축기관에 매각하고, 이 매각 대금과 준비금으로 축적해둔 자금으로 예금자들의 예금을 100% 지불해 주었다.

몇년 지나지 않아 연방저축융자보험공사와 연방예금보험공사 모두 거의 50년 동안 쌓아 온 누적 준비금과 자본금이 바닥났다. 예금보험기관들도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했다. 예금보험 보장으로 제공할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자본금이 마이너스 상태인 저축기관들을 청산하고 폐업시킬 만한 여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예금보험기관들은 실패한 저축기관들이 영업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다. 그들은 관용이라는 정책을 찾아내 이들 파산 상태의 저축기관들이 영업 상태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그래도 연방저축융자보험공사와 연방예금보험공사의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보전해야 했는데, 재무부로부터 납세자들의 돈을 가져다 쓰는 방법과 살아남은 은행 및 저축기관들이 내는 예금보험료를 인상하는 방법이 있었다. 살아남은 은행 및 저축기관들은 그들의 실패한 경쟁자들이 발생시킨 손실을 메우기 위해 보험료를 인상한다는 데 강력하게 저항했다. 실패한 저축기관들의 폐업 청산과 예금자들에 대한 예금지급 보장을 위해 연방저축융자보험공사와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미 재무부로부터 자금을 얻으려는 노력에 미국 의회의 몇몇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한편 일부 기업가들은 실패한 저축기관을 살리는 방법은 이들이 예금과 대출을 빠르게 확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신규 모기지 채권과 대출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예전의 저금리 모기지 채권에서 발생한 손실보다 커지도록 하는 것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982년 미국 의회는 저축기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저축기관들이 거의 모든 유형의 유가증권을 매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와 동시에 개인 한명이 단일 저축기관에 예금할 수 있는 예금보험 보장한도 금액을 4만 달러에서 10만 달러로 확대했다.

이들 실패한 저축기관들은 어떤 채권이나 유가증권이든 높은 금리만 제공되면 매수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결국 이들은 정크본드를 소화해줄 자연스러운 시장 가운데 하나가 됐다.

드렉셀 번햄 램버트의 마이클 밀켄은 정크본드의 수요와 공급 모두를 크게 확대시키는 몇가지 시장혁신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금리의 하락과 경제성장률의 상승은 정크본드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고무즉인 환경을 창출했다. 밀켄과 드렉셀의 영업 포인트는 투자등급 채권의 금리를 상회하는 정크본드의 금리 초과분이, 있을지도 모르는 정크본드 발행기업의 파산으로 인해 정크본드 보유자가 입게 될 손실을 상쇄하고도 추가적인 수익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밀켄이 자금을 조달해 준 기업사냥꾼 가운데 실제 현업 경험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샘 아저씨의 돈 - 미국 정부가 보장하는 예금계좌의 판매로 확보한 자금 - 을 50개 이상의 기업을 인수하는 데 사용했다. 그들은 이들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종종 비싼 가격을 지불했지만, 그때 그들이 지불한 돈은 자기 돈이 아니라 샘 아저씨의 돈이었다.

이들 기업 대다수는 정크본드 발행잔고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에 충분한 현금 수입을 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이들 기업은 추가로 새로운 정크본드를 발행해 기존의 정크본드 잔고에 대한 이자를 지불했고, 밀켄과 친밀한 저축기관들은 새로 발행한 정크본드도 매수해 주었다. 활발한 정크본드 시장이 있는 한, 돈 만드는 기계는 계속 돌아갔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연방 감독당국이 규정을 바꿔 저축기관들의 정크본드 신규 매수를 금지하자 정크본드 시장은 붕괴했다.

결국 저축기관 대란은 연방정부에 1500억 달러의 손해를 입혔다. 만약 예금보험기관의 자본금이 고갈된 1980년대 초에 미국 의회가 실패한 저축기관들을 청산하기 위한 자금을 이 기관들에게 공급했다면, 당시 미국의 납세자들이 부담해야 했던 비용은 200억 ~ 300억 달러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밀켄과 그의 가족은 억만장자가 됐다. 그는 5억 5000만 달러의 벌금 및 과징금을 물고 연방정부의 컨트리클럽에서 30개월을 보냈지만, 출소 후에도 모름지기 갑부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 미국은 사기, 사취, 부정의 대풍작을 거두었다.

언론에서는 전력 시장의 규제완하 물결을 이끈 유일한 주인공으로 엔론을 치켜세웠다.

2000년 봄 이후 미국의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한 직후, 한때(주로 자신의 홍보업체에 의해) 미국의 7번째 거대 기업으로 알려졌고, 포츈이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가운데 하나라고 손꼽은 엔론이 파산을 신청했다.

기묘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엔론의 최고경영자들이 언제 갈림길에 서게 됐고, 정교하게 설계된 회계조작의 궤도를 밟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이다.

엔론은 다음해의 이익에 대해 부정적 영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의 이익을 늘리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다음해의 이익을 늘리는 문제는 다음해에 풀면 되는 것이다.

엔론이 막대한 부채를 숨기고 있을 당시, 회계조작을 통해 10억 달러가 넘는 장부상 이익 부풀리기가 행해졌고, 부채는 부외거래 자금조달을 위해 설립한 합자회사, 즉 특수목적 금융법(Special Financial Vechicles : SFV)에게 은닉했다. 다수의 은행과 제조업체들이 차입 가능 한도를 늘리는 데 유리하도록 대차대조표에서 부채를 제거하기 위해 SFV를 활용했다. 회계 규정상 SFV의 주식 가운데 3%가 비관계인에 의해 소유되는 한, SFV는 별도의 독립된 법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엔론은 SFV의 차입으로 확보한 현금을 자사 주식의 주가를 떠받치는데 사용했다. 이것은 닉 리슨이 썼던 갈 데까지 가는 전략의 일종이다. 만약 엔론의 주가가 하락한다면, 이 합자회사의 가치도 하락할 것이고, 그들은 물에 잠기게 된다.

아더 앤더슨은 엔론으로부터 회계감사의 대가로 연간 200만 달러, 컨설팅 대가로 2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이 점은 컨설팅 수입을 확보하려는 아더 앤더슨의 욕망이, 엔론이 어떻게 이익을 측정해야 하는지 그 적합성에 대한 앤더슨의 판단을 흐리게 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지만, 이것은 관대한 언급이다. 아더 앤더슨은 엔론이 선택한 의결권 없는 사외이사 가운데 한명이었다. 엔론 이사회의 일부 구성원은 엔론으로 부터 자문료를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사회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의 이해 갈등이 있었다.

회계조작은 세가지 주된 유형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수입의 과다 계상과 증가한 부채의 과소 계상이었다.

월드컴은 1990년대 60건 이상의 인수합병을 전개하며 가장 빠르게 성장한 통신업체 가운데 하나였다.

월드컴은 피인수 기업의 주식을 월드컴의 신규 발행 주식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인수비용을 지불했다.

월드컴의 주당 순이익은 주가가 더 낮은 다른 회사를 매수해 그 회사의 순이익을 합치는 방식이 계속 이어진 덕분에 그만큼 빠르게 증가한 것이지, 통신업체로서의 열등한 영업성과 때문은 아니었다.

에버스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월드컴의 주가를 높게 유지하려면 주가가 낮은 다른 회사들을 계속 인수해야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인수의 결과로 월드컴의 덩치가 커짐에 따라 순이익의 증가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갈수록 더 규모가 큰 기업들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 - 기업인수를 통해 주당순이익을 증가시키는 회사들의 공통된 문제 - 는 월드컴의 덩치가 커져가면서, 매력적인 인수대상으로 남아ㅣㅇ는 통신업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월드컴이 마지막으로 인수한 업체는 미국 통신산업에서 가장 혁신적인 회사 가운데 하나로, 장거리 통화 서비스를 장악하고 있던 AT&T의 독점을 극초단파 전송탑을 사용해 격파한 바 있는 MCI였다. MCI는 규모가 너무 커서 회사의 이름도 MCI월드컴으로 바꿔야 했다. MCI월드컴은 곧이어 주당순이익의 성장세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에스 스프린트(US Sprint)와의 합병을 시도했지만 감독당국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 직후 MCI월드컴은 파산신청을 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었다. 이어진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회사의 재무담당 최고임원은 48억 달러에 달하는 경상비용을 투자로 처리해 이익을 과다 계상했고, 이렇게 부풀려진 숫자는 최종적으로 100억 달러에 달했다. 이 같은 회계부정의 주된 이유는 순이익의 성장 속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주가가 떨어졌을 것이다.

엔론과 월드컴은 그들 자신이 만든 성공의 희생물이 되었다.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 애널리스트들은 각 기업의 분기 순이익을 예측하는 관행을 만들어냈다. 기업이 애널리스트들의 이익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할 때마다 주가는 15~20% 하락했다. 큰 타격이다. 그래서 재무담당 임원들은 게임을 하기 시작했는데, 두가지 방식이었다. 다가올 이익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질 것 같으면, 비용은 당겨쓰고 수입을 뒤로 미루는, 이익의 인식 시점을 지연시키려는 유인이 생겼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월 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이 넘어야 할 쟁애물 높이를 올릴 때 일회성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익 - 앞서 인식 시점을 지연시켜 숨겨두었던 이익 - 을 새로이 상향된 이익 목표를 달성하는 데 써먹을 수 있다. 반대로 기업이 발표할 이익이 목표치에 미달할 경우에는 지출을 뒤로 미루고 수입은 앞당김으로써 미래의 이익을 빌려 쓰려는 동기가 강해진다. 이 경우 다음 분기에 보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0억 달러 규모의 기업집단인 타이코의 대표 데니스 코즐로프스키와 재무담당 최고임원 마크 슈와츠는 연방 정부에 의해 수억 달러의 회사 자금을 두가지 방식으로 사취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취 방식의 하나는 타이코 이사회의 승인 없이 타이코 주식을 살 수 있는 스톡옵션을 자신들에게 부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비를 쓰기 위해 타이코의 공금을 유용한 것이었다.

셸 오일(Shell Oil)은 자사의 원유 매장량을 과대 포장한 죄목으로 미국과 영국의 감독당국에 1억 5000만 달러의 벌금을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땅속에 묻혀 있는 원유 매장량을 계산하는 것은 빌리 솔 에스테스의 비료 탱크 숫자를 헤아리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2003년에 헤지펀드와의 거래 가운데 일부는 합법적이었으나 대부분은 불법이었다. 또 뮤추얼펀드 지분 소유자 모두를 동등하게 처우한다는 뮤추얼펀드와 그 주주 간의 암묵적 계약은 헤지펀드와의 모든 거래에서 무시됐다.

펀드 판매계약서의 또 다른 표준적인 문구는 뮤추얼펀드가 어느 기업의 주식을 매수할 경우, 펀드 운용사의 임원들은 해당 주식을 매수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펀드 임원들이 해당 기업의 주식을 매수할 경우에도 임원들은 선취매 - 뮤추얼펀드가 동일한 기업의 주식을 매수하기 이전에 임원들이 그들의 사적인 이해를 위해 그 기업의 주식을 미리 매수 -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펀드들의 공통적인 관행은 각 펀드가 소유하고 있는 유가증권에 대한 정보를 매 분기 말에만 공개하며, 분기 도중에는 개개 유가증권의 매매에 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헤지펀드가 뮤추얼펀드와 공동으로 시장간 시차를 이용한 거래를 벌였다.

폰지금융을 벌이는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그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다.

메릴린치의 헨리 블로짓은 닷컴 기업 주식의 목표가격 제시로 이름을 날렸고, 그가 제시한 목표가격 가운데 일부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헨리는 그가 미국 대중에게 강력 매수를 권유한 종목 가운데 일부가 형편없다며 사내 이메일을 통해 조소했던 일로 주목을 받았다.

샤잠 주식은 보통 주당 2~5달러에 거래되는 저가 주식이고, 애당초 이 주식 물량의 다수는 보일러샵을 소유한 내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들 내부자는 자기들끼리 주식을 사고 팔아서, 예컨대 주가를 2달러에서 3달러로 올리며 주가 상승을 관리한다. 주가를 올려놓고 나서 안면부지의 개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 6주동안 샤잠 주식의 50%에 달하는 주가 상승에 대해 얘기한다. 이들은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급등 주식을 매수하려는 욕구가 훨씬 크다는 것을 배웠고, 또한 깔끔하지 못한 투자자들이 저가 주식을 선호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기는 신뢰를 악용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절도와 다르다.

도덕적인 행동과 비도덕적인 행동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옛날보다 지금이 덜 희미하다. 현대성이 후진성과 구별되는 한 가지 특징은 도덕성이다. 사회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규율이 가문 안에서만 존중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이런 여건하에서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절도면허증을 가진 사람과 진배 없기 때문에 제 식구를 감싸는 인사가 효율적이었다.

이 때는 횡령과 착복을 범죄로 보지 않는 것이 인지 상정이었기 때문에 어느 상점의 점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경쟁력 있는 새로운 사업이 주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업과 절도, 그리고 상업과 저작권 침해 사이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았다.

사기가 물가상승의 한 산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생활비 상승이 가족의 예산을 압박할 때, 일부 가정의 가장들은 소득을 늘리기 위해 추가적인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이와 좀 다른 시각으로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빠져드는 - 피할 수 있는 무지가 없는 상태의 - 교란적 투기 행위는 복권을 살 때처럼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여자들에게 효용을 주는 도박이라는 견해도 제시됐다.

사기가 피할 수 있는 무지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을 사기칠 수는 없다는 필즈의 신념에 동의하고, 사기의 피해자들이 비난해야 할 주된 대상은 그들 자신이라고 결론짓기도 한다. 어떤 정신병리학자들은 사기범과 그의 피해자들은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공생적인 애증의 관계 형성 속에 같이 묶여 있다고 믿는다.

부정행위는 경제가 호황기일 때 증가한다. 재산은 호황기에 만들어지며, 개인들은 부의 증식 과정에 끼어들기 위한 탐욕에 빠지고, 사기범들이 이 탐욕을 이용하려고 등장한다. 호황기에는 스스로 제 털을 깎이려고 줄지어 서 있는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자신들을 사기범의 희생물로 제공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한다.

사기가 호황기에 증가하는 것은 마치 부의 증가가 탐욕의 증가를 촉발하는 것인 양, 탐욕이 부보다 더 급속히 커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기는 자산가격의 하락을 유발하는 신용 시스템의 긴장으로 인한 금융 불안 국면에서도 증가한다. 이 단계에서는 재정 파탄을 피하기 위해 부정행위가 감행된다.

이들은 모두 나중에 더 많은 주식을 매도할 수 있도록 공개시장에서 자사 주식을 매수해 주가를 떠받쳤다. 주가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자사 주식을 매수하는 은행은 주식 매수에 현금을 지출할수록 예금 대비 현금 보유 비율이 떨어지고, 자신의 유동성을 축소시킨다.

사기와 횡령이 드러나면 종종 붕괴와 패닉으로 치닫는 불안 국면을 증폭시킨다.

거품은 일반적으로 명백하게 합당하며, 적어도 합법적인 목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활동이 사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자금조달이 파국을 맞게 된 것은 두가지 오류에 기초한 잘못 때문이었다. 주식과 채권이 화폐라는 오류, 수요 증가에 따른 통화 증발은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오류다.

폰지는 예금이자로 45일동안 40%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해고된 장교 출신인 플라흐트는 연 40%의 이자 지급을 약속하고, 과부와 고아들까지 포함된 1600명의 푼돈을 모아 주식시장에서 거래할 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주식 매입으로 이익을 내지 못했고 6년간 감옥에서 보냈다.

경제의 호황국면이 더욱 진전되고 탐욕이 증폭될수록, 거품의 이유도 더욱 얄팍해지며 마치 잔 거미줄같이 너절한 거품들이 늘어난다.

1990년대말 주식시장 호황기에도 일부 기업들은 아무런 사업계획도 만들어놓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이 보다 늦은 시기로 오면 역사가와 소설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식공모가 거의 현실성 없이 진행됐음을 지적했다. 다수의 기업들이 사업에 착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철도 사업은 노선도 사람 왕래도 없는 곳에서 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건설업체들이 버섯처럼 불어났다. 이들 업체 가운데 다수가 건설사업보다는 건물부지에 투기했다.

금융 불안은 손실이 더 불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실을 떠넘기려고 애쓰다가 발생하는 부정을 야기한다.

새로 들어오는 자본 불입금이 탐욕스런 내부자들에게 지급되는 이익에 미치지 못했을 때, 블런트는 자신의 용도로 남해회사의 현금을 차입해 썼다.

영리한 사람이지만, 이전에 구멍 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그의 방식은 위험하다.

또 다른 독일 금융업자이자 함부르크의 은행가인 구스타프 고드프로이는 1873년 철도와 광산 주식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는, 그의 주식시장 거래 포지션을 지탱하기 위해 자신의 해외 무역상사 자금을 빼냈다.

이들 구제 불능의 낙관론자들은 첫 시도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패하고 난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도전하면서 종종 도박 규모를 두배로 늘리고, 도덕성이 의심스럽거나 명백히 불법적인 거래를 동원해 위험을 증대시킨다.

돈을 벌어라. 할 수 있다면 정직하게 돈을 벌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라.

돈, 돈을 계속 벌어라. 그리고 나서 혹시 미덕이 스스로 따라오겠다고 하면, 그리 하라.

문학의 세계에는 청약금을 지불하는 것보다는 청약 자체에 탁월한 재주가 있고, 재정적 의무를 노름빚 정도로 하찮게 취급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기도 했던 고상한 도박꾼과 내부자들을 단죄하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성공하면 그는 돈을 챙길 것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지불하지 안을 것입니다.

귀족들은 이사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비르스는 자신들이 감당할 능력도 없는 철도회사, 은행 그리고 여러 제조업체들의 이사회에 앉아 있는 오스트리아의 공작, 제후, 백작, 남작 등 온갖 귀족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투기에는 일반적으로 언론도 일조한다. 언론계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장사치고, 일부는 비판적이며, 일부는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는 아직 언론이 미숙한 단계에 있었지만, 1837년에 한 언론인은 나에게 광고비로 3만 프랑을 준다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회사라도 그 회사의 모든 주식을 판매하는 책임을 지겠다 는 편지를 썼다.

리용 라르와르 은행의 샤를로 샤바리는 대부분 돈을 주고 제공하는 배포자료를 마치 신문사 기자가 작성하는 기사처럼 활용하는 수법을 썼는데, 그의 사업을 선전해주는 기자가 500명에 달했다.

유럽 대륙에서 비판적 언론은 19세기 내내 아주 천천히 성장해나갔다.

여키스는 합법적인 거래와 부당한 거래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사업을 했는데,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새로 설립된 시카고 대학교에 천문관측소를 기부함으로써 채권 발행에 우호적인 여론을 얻어냈다. 기부 소식이 널리 홍보됨으로써 그는 명성을 회복했고, 유럽에서 시가전차 채권을 판매할 수 있었다.

투자자 칼럼을 통해 주가를 띄우기 전에, 친구에게 귀뜸해 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진 수법이지만, 오늘날에는 내부자 정보에 기초한 주식매매를 포함해 이런 불법적인 행위는 보다 쉽게 발각된다.

어떤 종목의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뉴스가 나오기 전에 행해진 해당 주식과 그 주식의 콜옵션과 풋옵션에 대한 수상한 거래들은 이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된다.

이 기법 덕분에 친구에게 사전 정보를 제공한 월스트리저널의 투자 평론가 포스터 워넌스와 자신이 이사로 일하고 있는 회사에게 닥칠 일을 친구에게 일러준 전직 국방부 차관보 테이어가 체포됐다.

아주 최근에는 인터넷이 주가 조작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됐다. 17세 소년 조나단 레벡은 자신이 보유한 거래량이 극히 적은 종목들에 대한 뉴스를 인터넷 대화방에 올렸다.

MSNBC는 비즈니스 뉴스 전문 TV 방송이다. 이 방송 프로그램의 출연자들 다수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을 추천하고 있다.

당초 목적에서 벗어난 자금 유용, 자본금이나 차입금을 이용한 배당금 지급,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자사 주식의 거래, 새로운 정보의 불완전한 공개 상태에서의 유가증권 매도, 내부자 이해에 따라 경쟁을 배제한 매수 행위나 자금 대여에 회사 공금을 사용하는 행위, 실행되지 않을 허수주문의 접수, 회사 장부의 조작.

영국 철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던 조지 허드슨은 1846년 철도 광기가 일었을 때, 위에 열거된 범죄 가운데 거의 모든 종류를 동시에 저질렀다.

미국의 1920년대는 지금까지 세계에 알려진 최대 규모의 대형 금융 사기 시대로 일컬어져 왔다.

체이스 뱅크의 앨버트 위긴스는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는데, 상원의 진상조사에서 자신의 은행과 자회사 그리고 고객들에게 손해를 입힌 사적인 거래의 진상이 드러나자 그의 명성은 산산조각났다.

회계법인의 당초 역할은 재고와 채권 계정의 가치를 부풀리려는 경향이 있는 기업 재무 관리자들의 회계조작으로부터 일반 투자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회계법인은 기업의 재무관리자가 제시한 재무실적 자료를 확인하고 인증하는 일로 돈을 받았다. 회계사들은 공적 이익의 파수꾼일수도 있지만, 그들의 용역에 대한 대가는 기업의 재무관리자들이 주는 것이었다. 회계감사를 받는 기업들 중에 회계법인의 회계사들을 위협하는 곳이 나타났다. 이 경우 회계법인은 고객 기업의 요구에 응하든가, 아니면 그 고객을 버리든가 양자택일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다수의 은행들이 1990년대에 당시 가장 혁신적인 헤지펀드 가운데 하나라고 믿어지는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LTCM)에 거액의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헤지펀드라는 용어는, 그 어의 속에 해당 기업이 그 주주와 투자자들의 수익 증대를 위해 막대한 차입금에 의존하면서도 위험을 줄이는 포트폴리오를 짜 놓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메디슨 애비뉴의 광고업계로 치자면 홈런급의 광고 문구다) LTCM의 수익률은 - 적어도 파산하기 전까지는 - 탁월한 것이었다. LTCM의 매매 기법과 수익 창출 수법을 은행들이 흉내 내고 싶어할 정도였으므로, 이들은 LTCM에 자금을 빌려주려고 열을 올렸다.

호황이 이어지던 1990년대 후반의 몇 년 동안은 모든 사람 -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일 것이다 - 이 부유해지고 있었다.

소속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가 증권 판매를 늘리려는 투자은행가들의 욕구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정신의학은 이런 상황에서의 자살은 과거 행동의 비합리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견딜수 없는 자존심 상실에서 연유한다고 설명한다.

도주는 자살보다는 덜 최종적인 형태의 탈출구다.

기소된 사람과 투옥된 사람의 숫자로 여러 경기순환 국면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사기와 부정, 자금유용, 체포, 배임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적 풍요감이 일정한 선을 넘었으며 상당한 사회적 파급이 뒤따를 것임을 알리는 중요한 징후다.

거의 모든 나라가 유동성의 부족을 - 특히 금융위기 기간 중에는 - 방지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많은 나라에서 국내 은행의 예금 인출쇄도 사태가 벌어질 확률을 낮추고, 유동성 부족이 채무상환 불능 위기를 촉발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을 차단하기 위해 일정형태의 예금보험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은행예금에 대한 공식적인 보험이 없는 상황에서도 많은 나라 국민들은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그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지고 보장해 줄 태세가 되어 있음을 믿는다.

불개입 원칙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당국이 당면한 위기에 개입주의적인 입장을 강화할수록, 다수의 시장 첨여자들은 그들이 입을 수 있는 손실이 정부조치에 의해 제한될 것이라고 믿게 되므로, 다음 번의 거품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에 있다. 이 같은 도덕적 해이의 논거는 정부 개입이 투자자들 다수의 뇌리에서 위험과 보상 간의 대응 함수를 일그러뜨려 미래의 손실 가능성과 손실폭에 대한 과소평가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투기자들이 무제한의 신용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위기가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도덕적 해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시스템에 안정성을 부여하기 위한 정책이 이례적인 고수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가담하도록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정부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경기 하강 국면에서 그들이 입게 될 손실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는다.

비용 대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패닉이 자신의 궤도를 달리지 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경제가 얻게 되는 이득이, 그렇지 않을 경우 투기자들에게 돌아갈 공정하지 못한 보상에 비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방임을 통한 청산론자들은 정부는 손을 떼고 불황이 스스로 청산하도록 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격 상승의 착란 증상에 붙들려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광기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착란 현상이 스스로 붕괴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패닉이라고 해서 전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대립되는 견해는 시스템에서 광기가 벌여놓은 투자와 거품을 정화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패닉의 확산으로 인해 투기자가 아닌 사람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신용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들의 건전한 투자마저도 일소해 버릴 위험이 있다는 양보적 입장이다.

다수의 유동성 위기가 갖는 하나의 특징은 시중 금리가 극도로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게 높은 금리를 지불하더라도 자금을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용시장이 가격 외적인 이유로 인해 닫혀버리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위기에서 나타난 증거를 볼 때, 패닉이 벌어지면 돈을 빌리는 것은 곤란하며, 때로는 아예 불가능하고, 그 어떤 가격(아무리 높은 금리)으로도 돈 자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금리의 시세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유가증권과 상품시장에도 패닉이 파급됨에 따라 현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패닉이 대중을 장악했다. 모든 사람이 돈, 돈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돈을 마련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담보나 보증이 어떤 것이냐는 사람들의 안중에 아예 없었고, 오직 돈을 구할 방도가 없다는 것만이 문제였다.

한때 24시간 동안의 자금융통에 4%나 되는 금리를 요구했다. 이처럼 높은 금리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신용 경색은 유가증권의 투매를 재촉했다. 물론 금리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치솟은 것은 실제로 현금이 희소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불신의 만연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였다.

패닉은 내버려두는 것 자체로 치료될 수 있다는 선험적 시각을 반박하는 가장 유력한 논거는 패닉이 그렇게 방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당국은 개입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린다.

시카고 학파는 당국이 단기적인 정치적 동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장 참여자들이 늘 당국보다 더 똑똑하다고 가정한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초기의 강력한 도덕적 입장은 다른 다수의 사례에서 패닉이 증폭됨에 따라 뒤집어졌다.

패닉을 중지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시장을 폐쇄해 거래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일부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에서는, 하루 가격 변동폭의 최대 한도를 설정해 상한가나 하한가에 도달하면 나머지 거래시간 동안 거래를 중지시킨다. 증권거래소에서는 개별 종목의 거래체결 담당자가 매수 주문과 매도 주문간의 불균형이 이례적으로 커질 때마다 종종 타임 아웃을 적용하곤 했다. 이 같은 서킷 브레이커, 즉 일시적 거래 정지는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의 시장 붕괴 이후 미국 주식시장에 도입됐다.

이 상인들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품 재고를 당시 통상적인 시장가격보다 30~4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했다.

상인들이 자본금의 6배에 해당하는 규모의 상품에 투기한 상황에서 상품가격이 17%만 추가로 하락한다면 그들의 자본금 기반이 와해되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일본의 거품 붕괴로 인해 도쿄와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은행과 많은 지방은행들이 보유하던 대출자산의 가치가 그들의 예금부채 밑으로 급락했다.

은행가들의 수중에 들어온 예금을 보증해 준다는 것은 공금횡령은 아니더라도 은행가들더러 투기하라는 면허증을 발급해주는 셈이 되었을 것이고, 은행가들의 무책임을 막을수 있는 유력한 제동장치인 예금인출 위협을 제거해주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금보증은 은행의 부실경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1933년 3월 2일 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보험기관은 예금보험금의 지급으로 인해 거액의 손실을 입었고, 결국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한 자금은 재무부로부터 차입해 마련했다. 1990년대 초의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 납세자들이 물어야 할 총 손실액은 1500억 달러로 추정됐는데, RTC가 담보 물건과 불량 채권을 처분해 얻을 예상 매각 대금이 미국의 경제성장률 회복으로 늘어날 것을 감안해도 총 손실액은 1000억 달러로 집계됐다.

자기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업에 손을 대겠다는 마음을 아예 먹을수 없었던 오랜 전통의 영국 상인 집단이, 끌어 쓸 신용이 있는 한 결코 멈추지 않는 무절제하고 정신 나간 투기자들에게 밀려나고, 사악하리만큼 적은 자본금만을 가지고 투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업가들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작금의 실상을 신사 여러분께서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상품을 판매할 시장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해악인 상황에서 대출금으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여력이 생겼다고 해서 과연 무슨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은행경영의 건전성을 위한 대부분의 규칙은 제반 규제조항들에 이미 규정되어 있거나, 은행업의 전통에서 묵시적 관례로 되어 있다. 다수의 규정들이 은행과 규제당국 양측 모두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다. 은행들은 시장가치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 즉, 그들의 대출과 투자를 한참 전의 비용이 아니라, 시장에 매도했을 때 실현될 수 있는 가격으로 매일(혹은 매주, 매월) 평가해야 한다고 - 규정하고 있다. 문제 여신과 의심쩍은 여신의 결손처리에 대비하기 위한 충당금이 준비돼야 한다. 대출손실의 증가로 인해 은행의 자본금이 감소하면, 해당 은행은 자본금을 증자하거나 전통적 규정에 따라 폐쇄되어야 할 것이다. 은행이 이런 규정들을 준수한다는 것이 이례적임을 예증하듯이, 1987년 봄 씨티코프는 자신의 제3세계 채권의 장부가치를 줄이고, 연방저축융자보험공사는 500개의 채무상환 불능 은행들이 자기자본을 재구축하기에 충분한 채산성을 회복하리라는 바람에서 이들의 영업 유지를 허용했다.

자산이나 부채에 대한 자기자본비율 규제가 강조됨에 따라 이를 피해가려는 일부 은행들의 부외 거래 관행이 나타났다. 이런 거래는 은행에 수수료나 위탁비용을 발생시키지만, 거래 대상인 자산이나 투채는 대차대조표에서 빠지는 일종의 각주처럼 임의적이거나 의제적인 상태가 된다. 이 같은 부외거래에는 금리스왑과 통화스왑, 선물계약, 옵션, 증권발행 인수위험, 환매(repo: 일정 시점 후에 재매수를 조건으로 하는 유가증권의 매도), 다양한 융통어음 발행 장치들이 포함된다.

호황기에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여신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은행 규제와 감독을 도입해야 한다는 강력한 논거를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논거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완벽한 이상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책임을 분담한다는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행의 관리부실은 위기가 드러나기 전에는 감지하기 어렵다.

경기가 확장되는 동안 규제와 감독 과정에서 불어나는 엔트로피가 시스템의 곳곳에 발생시키는 위험구역들은 경기가 수그러들때 갑자기 표면화된다.

지난 200년간 중앙은행을 경영하는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궁극적 대여자라는 개념의 진화였다.

궁극적 대여자는 대중들이 실물자산과 비유동성 금융자산을 처분하고 현금으로 전환하려는 쇄도 사태를 중지시키는 데 필요한 만큼의 통화를 공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 개념은 패닉이 발생할 때 화폐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통화량을 늘려주는 탄력적인 통화 공급이라는 개념이다.

은행과 일부 차입자들이 불안 국면에 빠질 때 궁극적 대여자의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확신이 생길 경우, 다음 번 호황기에는 신용을 주고 받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움이 저하될 것이라는 딜레마 때문에 끊임없이 따라붙게 되는 문제들이다. 궁극적 대여자라는 공공재가 있음으로 해서 대출을 건전하게 유지해야 하는 민간 대여자들의 책임감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패닉이 발생했을 때 유가증권과 상품을 팔아치우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쇄도를 막을 수 없을 경우, 다음과 같은 구성의 오류가 무대의 중앙을 장악하게 된다.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투자자들이 이 자산들을 매도함에 따라 유발되는 자산가격의 하락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 채무지불 능력은 물론 건실한 자본기반을 갖추고 있던 다수의 기업들까지 파산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망가진 포지션을 받쳐주는 그 어떤 지원도 청산을 지연시키고 부실한 조건을 악화시킨다.

광기가 낳은 응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면,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미치광이들로 가득 채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궁극적 대여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경제학자들의 지성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실천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과연 최종적인 통화당국이 중앙은행이냐 혹은 정부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1700년대에 영란은행이 궁극적 대여자로 등장했다는 언급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밝혀주는 요점이기도 하다.

영란은행이 이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대여자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입장을 취했다. 동일한 진화과정을 프랑스은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본유출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투기를 자극하고 위기를 격화시키는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추지 말아야 하며, 만약 위기가 발생할 경우에는 위기의 강도를 완화하고 그 지속 기간을 줄이도록 프랑스은행이 넉넉한 규모로 저렴한 어음할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 취해졌다.

화폐 수요가 갑자기 늘어날 경우 통화량이 쉽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순수하게 금속화폐에 의존하는 유통이 갖는 큰 결함이다. 지금은 화폐 수요가 아무리 돌발적으로 증가하더라도 지폐가 무제한으로 공급될 수 있으며, 갑작스럽고 대폭적인 화폐 수요의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긴급한 지폐 발행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은 없어 보인다. 이 같은 발권 권한은 남용으로 인해 희생될 개연성이 극히 높기 때문에, 아주 드문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돼야 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이 과연 지금의 패닉인가, 아니면 다음의 호황인가? 현실의 조건인가? 아니면 원칙인가?

우리 역사상 발생한 모든 은행위기의 상세한 경위를 돌아보면, 책임감과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한두 명 혹은 그 이상의 뛰어난 개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의 붕괴는 종종 누적적인 과정으로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이 과정이 일정 지점을 넘어가도록 내버려두면, 얼마 후에는 그 자체의 전개 과정에서 동력을 강화한다. 산사태의 발단이 되는 바위를 붙드는 데 그리 큰 힘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산사태가 미칠 파괴력이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은 패닉을 중지시키기 위해 돈을 제한 없이 빌려줘야 하지만, 앞으로 패닉이 일어날 개연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시장을 시장 자체의 장치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있을지도 모르는 개연성을 눈앞의 현실이 압도해 버리는 현상을 피할수 없게 되고, 오늘이 내일에 우선한다는 것이 딜레마다.

영란은행이 마지못해 수용한 것은 떠밀리는 사람의 불쾌한 답변 같은 것이었다.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부실한 서명은 3개가 아니라 10개라도 모을 수 있다.

1857년 위기에 대한 분석은 연방정부가 효과적으로 개입할 능력이 없었으며, 은행을 포함한 대중들은 위기를 저지하기 위한 지침 없이 그대로 방치됐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개입은 너무 과다했고, 그 시점도 너무 빨랐던 것으로 드러났다.

현금 수요가 이례적으로 늘어날 때도 지방은행들의 준비금은 사용되지 못하는 자산이라는 것이 우리의 은행 시스템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사실이 1890년에 드러났다.

뉴욕의 은행들은 그들의 위상에 수반되는 제반 책임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대규모 준비금을 유지하지 않는게 일반적이었다.

영향력 있는 신용기관들이 일반의 이익을 위한 일과 함께, 결국은 자신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일을 동시에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우리의 주력 자금시장이 가지고 있는 약점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런던에서는 궁극적 대여자에 대한 공식적인 규정이 존재해서는 안되지만, 위기 발발시에는 궁극적 대여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있었다. 영국 정부의 직관력 있는 정치인들과 영란은행을 경영한 상업은행가들은 구제 자금의 집행 권한을 영란은행이든 정부든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불확실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영란은행이나 정부 중 어느 하나에 구제 조치의 권한이 공식적으로 부여될 경우, 일반으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기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너무 큰 집단에 대한 책임을 감당지 못할 것이다. 책임이 오직 하나의 주체에게만 주어진다면, 행동을 요구하는 압력을 버텨내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최적의 조건은 비슷한 지성을 보유한 소수의 행위자들이 서로 긴밀히 조율되는 과두체제식의 관계를 형성하고, 부정행위자들과 무임승차자들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결국에는 최종적인 책임을 떠맡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책임을 떠안은 한 사람이 곤란에 빠졌다. 1920년대 말 당시 뉴욕연방 준비은행 총재였던 조지 해리슨은 1929년 10월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할인 창구를 넓게 열어놓았다. 그는 10월 중 공개시장에서 1억 6000만 달러어치의 정부채권을 매입하고, 11월에 다시 2억 1000만 달러어치를 사들임으로써, 워싱턴의 FRB가 규정한 한도를 초과했다.

배젓은 정부가 임명하는 위원들로 구성된 기구에 궁극적 대여자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 위원들이 부적격자들에게 자금을 대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반대의 근거였다. 영란은행이 정치권에서 벗어나 있고 정치적 압력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기구인 반면, 이 위원들은 정치적 압력에 예속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담보에 대한 딜레마는 패닉이 과연 중단될 것인지, 또 언제 중단될 것인지에 따라 담보의 건전성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제이피 모건이 유일한 고려 대상으로 삼았다는 차입자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은행가들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돈을 빌려준다는 심술궂은 논평에 관련된 딜레마가 존재한다.

중앙은행들은 모두 전형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 원칙이 쉽게 깨질 수 없을 때,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원칙이 너무 쉽게 깨질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어음이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또는 차입자가 부적격이기 때문에, 어음할인을 거부할 수 있는 재량권은 언제나 완벽한 객관성에 따라 집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생사여탈권을 궁극적 대여자에게 준 것이다. 중앙은행 이사진이 쉽게 매수되는 무절조한 인물들이라고 비난한 문헌들이 즐비하다.

1842년 두번째 철도 광기가 불기 시작했을 때, 영란은행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기업과 성공적인 철도개발 경험이 있는 기업들에 대한 비정규적인 대출 집행을 승인했다. 이에 대해 철도 투기의 과열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추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원칙이 없다는 것이 원칙이다.

프랑스 의회는 웰즈의 은행 같은 중요한 은행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은행은 1500만 프랑의 신용한도를 얻었다.

궁극적 대여자가 내려야 하는 결정 가운데 일부는 재무부증권의 할인 여부를 결정하는 일처럼 쉬운 것들이 있다. 그리고 위태로운 은행의 불확실한 담보에 대한 수용 여부와 같이 어려운 것들도 있다.

너무 모자랐고, 너무 늦었다 는 것은 중앙은행의 경영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의 어휘 목록에서 가장 우울한 어구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얼마나 충분한 것인가? 또 언제가 적기인가?

월터 배젓의 원칙은 벌칙적 금리로 제한 없이 대출을 공급하는 것이다. 제한 없이 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예외적 상황에 처한 차입자로서 채무지불 능력과 함께 양질의 담보를 갖추고 있는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위기 때마다 여러 중앙은행을 유혹하는 임시방편 수단들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 대여자는 할인 장치를 통하지 않고, 공개시장에서의 국채 매입을 통해 시스템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은행은 얼마나 통화공급량을 늘려야 하는 것인가?

시점 선택은 특수한 문제를 제기한다. 경기 확장이 점점 더 세게 그 강도를 높여 가면, 패닉이 촉발되지 않도록 하면서 확장의 강도를 늦추어야 한다. 붕괴가 발생한 후에는, 채무지불 능력이 없는 기업들이 파산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채무지불 능력은 있지만 단지 유동성이 부족한 기업들에게까지 위기가 확산될 정도로 오래 기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투기적 확장 국면이 벌어진 이후에는 궁극적 대여자의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억제 조치가 붕괴를 촉발하지 않고 확장 속도를 적정하게 둔화시킬 확률이 낮다고 판단될 경우, 궁극적 대여자는 개입 규모와 시점 선택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딜레마는 할인 방식보다 공개시장조작이 더욱 심각하다.

시점 선택은 예술이다. 이 말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에 대한 논의는 디플레이션 압력이 한 나라로부터 다른 나라로 전이되는 역사적 기록을 주된 소재로 다룬다. 이 전이는 종종 고정환율제하에서의 평가절하나 변동환율제하에서의 외환가치 하락을 통한 환율의 변화를 동반한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에는 일국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국가별 통화와 국가별 중앙은행이 존재하는 한, 환율의 변동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환율의 변동 가운데 어떤 것들 - 특히 한 나라가 무역 상대국들에 비해 낮은 물가상승률을 유지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처럼 - 은 필요하다. 이 경우는 해당국 통화의 외환가치 하락이 통화의 과대평가로 야기되는 실업에 비해, 보다 적은 비용으로 균형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충격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환율 변동이 불필요하게 값비싼 형태일 수도 있다. 외환시장에서 어느 나라 통화의 가격이 장기균형 가치에 비해 상승함에 따라 해당국 통화가 오버슈팅 국면에 진입하면 이 나라의 대외무역 부문은 거의 예외없이 디플레이션 충격을 받았다. 반대로 어느 나라의 통화가 가격이 장기균형 가치에 비해 하락함에 따라 통화가 언더슈팅 국면에 진입하면 물가상승률의 급등이 유발될 수 있다. 더욱이 실질 외환가치의 급격한 하락이 기업과 은행들의 광범위한 파산을 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의 폭을 줄이는 제도적 혁신과 정책 혁신은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일국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가 맡아야 하는 기본적 책임은, 국내 유동성의 부족이 채무지불 능력의 문제로 확대됨으로써 투매와 경계 매도가 없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파산을 야기하게 될 개연성을 줄이는 일이다. 일국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는 위태로운 투자와 부실한 사업 결정으로 인해 이미 파산 상태에 들어선 금융기관의 구제를 피하는 일, 그리고 이들보다 건실한 경쟁자들을 물가 수준의 하락과 디플레이션 충격이 유발하는 채무지불 능력의 상실 사태로부터 구제하는 일ㅎ 이 양자 사이에 걸린 팽팽한 밧줄 위를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가 맡아야 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필요한 환율 변동의 범위를 개선하고 경제적 펀더멘털 측면에서 불필요한 환율변동을 막기 위해 유동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국제적 신용은 적어도 4세기에 걸처 확대돼 왔는데, 정부가 해외 자금을 차입하고 국내의 돌발적인 자금 인출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은행들이 외국 은행에 필요한 자원을 의존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다른 예로 1997년 12월 한국 원화가 외환시장에서 그 가치의 3분의 1을 상실한 뒤 한국경제에서 터져 나온 숨넘어갈 지경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한국은 이때의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1%에 불과했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는 여러 나라들이 장기균형 환율에서 이탈한 시장 환율의 괴리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를 창출하는 일에서 한 가지 문제는 그 활동을 통제하게 될 법률적 틀과 운영규칙을 수립하는 것이다. 통일된 세계 통화가 없기 때문에 국제적인 궁극적 대여자는 불가피하게 한 국가 혹은 여러 국가 - 대외준비자산 보유고와 국제수지 흑자가 큰 나라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 의 통화를 국제수지 적자폭이 큰 나라들에게 대여하게 될 것이다.

1930년대의 부채 디플레이션은 기업 파산, 은행 파산, 물가수준의 하락이 반복되는 되먹임 과정을 동반했다.

상품가격 수준이 하락한다는 것은 명목 금리가 낮더라도 실질 금리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투자지출이 억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1990년대 말에 물가수준이 연 1%씩 하락하면서, 기업체 파산빈도가 이례적으로 높아졌고 부채 디플레이션의 순환이라는 고통에 빠졌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가 처한 환경은 일국의 궁극적 대여자와 기본적으로 두가지 방식에서 다르다. 그 하나는 유동성 위기가 환율변동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잦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환경에서는 법률의 규제가 보다 허약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나라의 통화의 외환가치 변동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일 자체가 심판이 내리는 판정일 때도 있다.

다수의 국제적 금융위기는 통화가치의 과대평가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나라들의 환율 변동과 함께 나타났다. 문제는 펀더멘털의 불균형 - 브레튼우즈 체제의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 시스템이 여전히 유효했을 때 IMF가 대중화한 용어다 - 으로 인해 자국통화의 외환가치가 변경돼야만 하는 나라가 언제 외환가치 변경을 실행해야 하는지, 그 시점을 결정하는 일이다.

중앙은행의 역사를 보면 국내에서 발생하는 대내적 자금 인출과 해외로 자금이 빠져나가는 대외적 자금 유출을 구별하고 있다. 대외적 자금 유출은 일반적으로 금리의 상승에 의해 반전될 수 있었다.

1931년에 나타난 연쇄적인 디플레이션은 그 이전의 사태들에 비추어 볼때, 그 규모와 종류가 다른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어려움에 처한 어느 중앙은행에 아무튼 신용이 부여되어야 한다면, 신용은 필요한 금액을 모두 채워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규칙이다. 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금액의 규모가 불충분해서 종국적으로 외환거래를 버텨내지 못한다면, 대여 금액 전부가 낭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위험은 존재한다. 무제한의 신용은 해당 국가가 금본위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했을 것이지만, 그렇게 유지되는 조건들은 조만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교훈은 해당 국가가 과도한 부담없이 화폐본위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무제한의 신용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국 통화의 평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이 너무 과도하다면, 신용을 동원하지 말고 외환가치 하락을 용인하라는 것이다.

인출쇄도가 독일로 옮아갔다. 독일의 은행업계는 투기 과열, 거액의 대출 결손처리, 부정, 은행가들간의 전쟁, 자사 주식을 매수하느라 유동성 준비 자산이 바닥난 은행들 - 고전적인 문제들이 총망라된 모습 - 에 의해 허약해진 상태였다.

1930년대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제적 신용기관을 설립한다는 동기에도 불구하고, IMF는 그 자체의 통화가 없기 때문에 궁극적 대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구조였다. 대신 IMF는 회원국들이 미미한 한도 내의 경상수지 적자 대금을 조달하는 일을 돕기 위해 여신을 제공할 수 있었다.

각 회원국에 제공될 수 있는 차관 규모는 IMF에 대한 출자액과 동일한 국별 할당액에 의해 정해지는 좁은 한도 이내로 제한됐다.

1950~60년대에 걸쳐 국가간의 자본흐름이 늘어났다.

투박한 양적 지표로 이 전개 과정을 제시한다면, 1947년 8월의 대대적인 자금인출 사태 당시 파운드화를 매도한 1일 최대 투기 금액이 1억 달러 이하였는데, 1969년 5월에는 독일 마르크화를 매수한 1일 최대 투기 금액이 15억 달러를 상회했고, 1971년 5월에는 1시간도 채 안돼 1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독일로 유입됐다. 더욱이 무지의 장벽은 계속 허물어져 가고 있어, 하루 거래 금액이 15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심지어 1500억 달러로 늘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국제적 자본흐름의 증가는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의 평가를 유지할수 있는 능력을 위협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국제금융의 대표적인 혁신 가운데 하나는 스왑연계망을 만들어 낸 바젤 협정이었다. 미국이 스왑 연계망 - 각국의 중앙은행이 일정액의 외국 통화를 자산으로 기록하고 이에 대응하는 동등한 금액의 외환을 부채로 기록하는 두 개 중앙은행 쌍방간의 신용한도 설정의 연계망 - 을 넓혀 가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스왑 연계망(혹은 두개의 중앙은행만을 상정하면 그 쌍방간의 스왑 라인)을 통해 인출된 자금을 다시 반제해야 했지만, 일단 스왑 라인이 설치되고 나면 해외 통화를 즉시 인출해 사용할 수 있었다. 최초의 스왑 라인이 1962년 3월 프랑스은행과 뉴욕연방준비은행간의 5000만 달러로 설정됐다.

스왑 라인으로 쓸수 있는 자금은 한 국가가 자국 통화를 방어할 때 쓰는 첫번째 방어선이 됐고, 두번째 방어선은 IMF로부터 얻는 신용이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스왑 라인을 활용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무너뜨린 가장 가까운 원인은, 미국과 독일의 자금시장이 역외예금 시장을 매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나라가 서로 대립적인 통화정책을 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국가간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괴리되는 통화정책이 추진되면, 대대적인 자본 이동이 유발되기 마련이다. 미국의 FRB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6~8개월간에 걸쳐 일종의 통화팽창 정책에 돌입한 반면, 독일은 고금리를 유지했다. 거대한 자금이 달러화 권역에서 마르크화 권역으로 이동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변동환율제의 채택이 이자에 민감한 자본 이동을 없앨 것이고, 일단 통화가 변동환율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중앙은행들은 기대하지 않은 외부 효가를 발생시키지 않고도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율의 변동은 투기자들 - 은행을 위해 투기에 가담하는 사람도 일부 포함해서 - 을 고무했다.

1973년과 1979년에 발생한 석유가격의 급등에 따라 원유 생산국들의 수출 소득과 이들의 대외준비자산 보유고가 급증했다. 더불어 부동산, 업무용 빌딩, 쇼핑몰의 매입을 포함해 원유 생산국들의 지출도 급증했다. 원유 수입국들의 차입은 는었다. 유가의 상승은 원유 탐사와 생산을 가속화했다.

북해와 멕시코, 여타 지역에서 석유 생산이 늘어나고, 1980년대 초 세계적인 경기후퇴로 인해 석유 수요가 감소하는 효과가 중첩되면, 석유가격이 떨어지게 됐다. 1982년 중반에는 멕시코와 여러 소규모 원유 생산국들이 재정난에 빠졌다. 석유 증산에 가담한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의 기업과 금융기관들 역시 문제에 직면했다.

스왑 협정에 기초한 신용은 선진 산업국가들에게만 한정됐고, 이머징마켓의 개발도상국들은 이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IMF으로부터 받는 신용에 의존했다.

뉴욕연방준비은행은 1982년에 10억 달러의 브릿지 론을 멕시코에 제공했고, 미 재무부는 전략원유비축 용도로 10억 달러어치의 원유를 매입하면서, 해당 원유 현물은 미래 시점에 인도받기로 하되 결제는 경상계정으로 즉시 처리해 주었다. 이 같은 이례적인 차관 제공 덕분에 멕시코는 채무 불이행을 피하고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채무국들은 이런 방식의 해결을 좋아했다. 이들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더 필요했고, 채권자들도 이 같은 해결방식을 좋아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채무국들의 채무 불이행으로 채권자들은 기존 대출을 결손처리하고 거액의 대출손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4년 멕시코의 금융위기는 1월의 농민반란에 이어, 제1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암살되면서 시작됐다. 해외투자의 유입이 둔화됐고, 멕시코가 외환시장에서 페소화를 지탱할 여력은 급속히 소진됐다. 1993년 11월의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참여한 북미 3개국의 특별한 관계를 주된 이유로, 미국과 캐나다는 1994년 4월 멕시코 구제에 나섰다. 미국이 내놓은 60억 달러와 캐나다의 7억 달러를 합쳐 67억 달러의 신용한도가 조성됐다. 멕시코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1994년 12월 멕시코 국내 자본의 도피와 이에 실망한 미국 투자자들의 자금 회수가 야기한 또 다른 위기가 페소화를 공격했다. 1995년 1월 미 재무부는 미국 외환안정화기금의 200억 달러, IMF의 180억 달러, BIS가 주선한 유럽 중앙은행들의 100억 달러, 캐나다의 20억 달러를 합한 총 500억 달러의 구제 자금을 조성했다. 이 같은 자금 규모는 시장에 확신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자본 유출이 멈추고 다시 멕시코로 자본이 흘러 들어왔다.

월터 배젓은 낮은 한도는 한도 돌파에 대한 기대를 자극하기 때문에, 궁극적 대여자는 제한 없이 대여해야 한다는 처방을 천명했다. 잠재적 필요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규모와 신용을 공급하는 것은 제한 없이 대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1997년 7월에 시작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풍요감에 젖어 투자 포트폴리오의 다변화에 매료돼 있던 선진국의 대여자들과 고도성장 가도를 달리며 투자와 성장률 증대를 추진하는 한편 서방의 금융시장 규제완화 압력에 놓여 있던 차입국들, 이 양자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이 밖의 다른 요인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정실 자본주의, 태국의 약체 정부, 한국의 거대 기업집단(재벌), 그리고 모든 나라에 만연했던 은행의 부실 대출이 있었다.

이 같은 자본유입에 따라 이들 나라의 통화 대부분이 과대평가됐는데, 경상수지 적자가 크고 통화가 과대평가된 나라들은 자본 유입의 감소를 유발하는 그 어떤 충격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 철칙이다.

IMF는 중앙은행이 아니어서 통화를 창출할 수 없다. 대신 IMF는 회원국들의 출자액과 자체적인 차입으로 마련해 둔 자금을 대여할 수 있다. IMF가 국내통화를 창출하는 중앙은행과 다른 차이점은 이런 할당체계다.

세계의 중앙은행이 IMF보다 더 효율적인 궁극적 대여자일 것이지만, 이런 기관이 생길 개연성은 없다.

1980년대 초에 일어난 커다란 충격 가운데 하나는 만성적인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였다. 미국은 100년 넘게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해왔다. 1980년경에 시작된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는 국제금융에서 미국의 위치를 커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 국가였고, 부채를 제외한 미국의 순채권액이 나머지 순채권 국가들의 순채권액 합계보다 많았다. 2000년 시점에는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됐고, 그 순채무액이 나머지 순채무국의 순채무액 합계보다 컸다. 미국의 순채무액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번영은 미국 소비자의 지출 증가와 가계 저축률의 하락에 따른 것이었다.

어느 영국 경제학자가 향후 5~15년 내에 미국 경제가 하락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상의 구체적인 시점에 대한 거론은 피하기는 했지만, 미국경제에 대한 그의 강력한 - 아마도 과장은 있겠지만 - 경고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7가지 과정 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했다. 미국과 미 달러화가 세계 경제와 금융의 주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달러화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교환수단으로서의 사용 규모는 줄겠지만, 적합한 대체 통화가 없기 때문에 세계적인 계산 단위로서의 기능은 계속 될 것이다.

유럽 연합이 경제력과 금융력을 키워서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미국의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정치 경제적 난제들에 여념이 없고 국제적 공공재의 제공에 따르는 비용의 지불을 꺼리며 주춤거리는 중이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체제가 잘 작동하지만, 위기 때는 지휘력의 방식에 뭔가 더 결정적인 것이 요청된다. 앞으로 다가올 몇년 동안 경제위기가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는 확률은 낮아 보인다.

지난 400년간의 통화 역사에는 금융위기들이 즐비하게 이어졌다. 금융위기는 경기확장, 신용 성장률의 상승, 경제성장의 가속화에 따라 투자자들의 낙관론이 증폭되면서, 취득하는 자산의 생산성과 결부된 수익이 아닌 단기 자본이득을 목표로 투자에 가담하는 개인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유형을 보였다. 신용 공급의 증가와 보다 탄력적인 경제 전망은 종종 경제 호황을 가져왔다. 경제 전도에 대한 낙관론의 증폭과 아울러 신용의 가용성 확대에 따라 투자지출이 늘었고, 개인 재산의 급증에 동반해 가계지출도 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룬 가장 이른 시기의 거품 가운데 하나는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의 튤립 광기 였는데, 이 때는 매수자가 매도자로부터 신용을 얻었다. 네덜란드에서의 합리적 활력은 비이성적 과열로 변이를 일으켰고, 경제는 잠시 호황 국면에 들어선 후, 튤립 알뿌리 가격의 폭락과 함께 성장률이 둔화됐다. 런던의 남해회사 거품과 파리의 미시시피 거품은 1720년에 일어났고, 둘 다 신용 공급이 급증하는 환경을 마련해 준 새로운 금융 기관의 등장과 결부돼 있었다.

1920년대 후반 몇 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주식가격 거품은 미국 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에 따른 국내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자동차 생산이 급증했으며, 전국 대부분에 전력이 보급됐고, 경제 전도에 대한 낙관론이 만연했다.

이들 위기 중에는 수많은 은행 파산을 동반하는 위기도 일부 있었고, 특정 통화의 평가 유지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초래된 위기도 일부 있었고,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거품 붕괴를 동반한 위기도 있었다.

1930년대 통화 위기의 연쇄 작용은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전개됐다. 어느 나라가 자국 통화의 금 평가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우려가 증폭된다. 중앙은행은 통화의 평가 유지를 위한 강력한 개입 의지를 시장에 확신시키려는 차원에서 금리를 인상한다. 금리 상승이 국내 경제의 디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기업과 은행의 파산이 증가한다. 이 상태에 이르면 국내 경제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평가 유지 노력을 포기한다.

일국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는 통화 위기가 유동성 위기로 번지게 될 개연성을 줄이기 위해 풍족한 신용을 제공한다.

제반 통화가치의 배열이 10년 전의 그것과 비슷해졌다는 것은 각 나라가 평가절하를 통해 획득한 경쟁 우위는 일시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대외준비자산의 규모가 클수록 해당 국가의 통화에 대한 투기 공격의 빈도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래 자산가격의 변화, 통화가치의 변화 그리고 은행위기와 빈도의 심각성이라는 측면에서 추론해 볼 때, 역사가 준 교훈들이 망각되고 무시되는 일들이 계속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멕시코(두번 발생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은행의 대출 손실은 은행 자산의 20~50%에 달했다. 몇몇 나라들의 경우 암묵적 혹은 명시적인 예금 보장을 위해 납세자들이 지불한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15~20%에 육박했다. 이들 나라 대부분이 겪은 대출손실은 1930년대 대공황기에 미국이 경험한 대출손실보다 훨씬 컸다.

뉴욕시의 프랭클린 내셔널 뱅크와 퀼른의 헤르슈타트 은행은 외환시장에서 다양한 통화들의 변동 방향에 거액의 위험 자본을 걸었다가, 회사의 자본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손실을 입고 결국 회사가 해체되고 말았다. 프랑스 최대의 은행 크레디리요네가 입은 대출손실은 회사 자산의 30%, 프랑스 GDP의 3%가 넘는 규모였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은행파산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1980~90년대에 일어난 은행 파산의 대부분은 한 나라의 수많은 은행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다수의 사례에서 한 나라의 거의 모든 은행들이 파산하는 시스템 전반의 사태였다. 다른 많은 나라들의 은행들도 거액의 대출손실을 입었고, 정부 소유의 은행이 아니었다면 파산했을 것이다.

일본과 노르웨이를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외환위기를 동반하지 않은 은행위기를 경험했다. 남아프리카와 브라질을 포함한 몇몇 국가들은 은행위기를 동반하지 않은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멕시코, 아르헨티나, 태국, 말레이시아, 러시아 및 여타 많은 나라를에서 나타난 지배적인 유형은 은행위기와 외환위기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의 많은 은행들이 석유가격이 급격히 하락할 때 파산했다. 같은 기간 동안 아이오와, 캔자스 그리고 농업이 주력 산업인 중서부 지역 여러 주의 소형 은행들도 대출 담보로 설정된 부동산가격의 급락으로 파산했다. 1980년대초 단기 금리가 급등할 때, 미국의 수천개 저축기간들이 그들의 자본금보다 많은 금액의 손실을 냈다.

1980년대 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이 대외채무의 상환을 이행하지 못했다. 1980년대 말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두 나라 모두 초인플레이션을 겪었고, 두 나라 정부는 국내 채무의 상환을 이행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에 다시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변동 가능한 평가에 따라 각국 통화를 준고정시키는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붕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일어난 외환위기는 이 시기와 물리적 시간이 맞먹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많았다. 1971년 8월 미국은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핵심인 금 1온스당 35달러로 설정된 미 달러화의 평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했다. 통화간 교환비율을 정해놓는 각 통화의 상대가치 체계가 1972년 1월의 스미소니언 합의에서 새로 확립됐지만, 약 1년간 유지되다가 1973년 2월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 이어서 대부분의 선진국 통화들이 시장의 변동환율에 맡겨졌다.

많은 나라들의 통화가 주된 교역 상대국 통화에 대해 보인 외환가치의 변동폭은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훨씬 더 컸다. 이 같은 큰 폭의 환율 변도은 초기 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변동하는 환율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국가간 물가상승률 격차에서 산출되는 통화간의 상대가치에 비해, 외환시장에서 나타나는 통화가치의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의 폭은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훨씬 더 컸다. 1970년대 말 미국 달러화의 외환가치는 독일과 일본의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미국의 물가상승률 격차를 기초로 예측한 것보다 급격하게 하락했다. 1980년대 초에는 독일보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달러화의 외환가치는 60%나 상승했다.

개발도상국 및 이머징마켓 국가 통화들의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의 폭은 선진국 통화들보더 더 컸다. 멕시코 페소화는 1994년 말과 1995년 초 대통령선거 및 권력이양 기간에 외환가치의 절반을 상실했다. 태국 바트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한국 원화의 외환가치는 1997년 하반기 6개월 동안 50~70% 하락했다. 러시아 루블화는 1998년 8월에 폭락했고, 브라질 헤일화는 1999년 1월 대폭 평가절하됐다.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2001년 1월 외환가치의 3분의 2이상을 상실했다.

1980년과 2000년 사이에는 그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자산가격 거품이 많이 발생했다. 1980년대 말 일본은 모든 자산가격 거품의 어머니 격인 엄청난 거품을 경험했다. 부동산가격은 9배 상승했고 주가는 6배 상승해, 일본의 금융재산이 급증했다.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역시 같은 시기에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거품을 겪었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및 인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1990년대 전반에 부동산과 주식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됐다. 미국 주식시장의 부는 1990년대 말 두배로 늘앴고, 닷컴과 정보기술 분야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4배나 증가했다.

은행 파산과 장기균형 가치에서 이탈하는 환율의 오버슈팅과 언더슈팅,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거품은 체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간 자금흐름의 규모와 방향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다양한 충격의 결과로 나타났다. 은행 파산 - 주로 세 개의 파동을 거치며 일어났다 - 은 해당국 통화의 급격한 외환가치 하락으로 인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진행되면서 붕괴 국면에서 나타나는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폭락으로 인해 발생했다. 이 같은 붕괴는 경제가 활발한 성과를 내고 있는 나라들로 유입되는 거액의 국가간 자금흐름을 초래하는 투기적 광기 현상에 뒤이어 나타났다. 거액의 자금유입으로 인해 이들 나라의 통화의 외환가치가 상승했고,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런 충격 가운데 몇 가지는 정말로 뜻밖의 것들도 있었지만, 예측 가능한 충격들도 여럿 있었다.

1970년대와 1990년대 멕시코와 1990년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경기 확장기의 광기 국면 동안 대외채무 잔고가 늘어났고, 그 이자의 지급을 신규 해외투자로 유입되는 현금에 의존하는 비중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은 무한정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누적 채무가 증가하는 차입자에게는 대여자가 제공하는 신용의 증가 속도가 줄어든다는 것은 - 비록 이 변화의 세부 징후와 시점의 예측은 불가능했어도 -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들 나라가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 없이 해외자금 유입의 감소에 적응할 수 있는 확률은 낮았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부동산가격이 어느 단계에서는 그 상승 행진을 멈출 것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거액의 차입금으로 최근에 부동산을 매입한 투자자들의 다수가 채무이자 지급액이 임대소득보다 커지면서 현금 동결 상태에 빠져버졌다.

19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기간 중에는 첫번째 주된 충격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연 5~6%대로 상승한 것이었다. 그 이전 20년 동안 미국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보통 3% 미만이었고, 독일 및 인근 서유럽 국가들의 물가상승률보다 낮았다.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떨어질 공산이 점점 커졌기 때문에,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급증했다. 미 달러화가 평가절하되거나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 기타 통화들이 평가절상될 상황이었다. 투자자들과 기업들은 눈앞으로 다가온 평가 변경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거나 혹은 그로 인한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금을 미국에서 빼냈다. 미국은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기피했고 독일, 프랑스, 일본은 그들 통화의 평가절성을 기피했기 때문에 국제수지의 불균형은 확대됐고, 독일과 일본을 포함한 기타 국제수지 흑자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가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71년 미국 경제가 둔화되고 물가상승률이 하락하자 FRB는 팽창적 통화정책을 취했고, 이로 인한 미 달러화 유가증권의 금리 하락은 더 많은 단기 자금이 뉴욕을 벗어나 해외 금융 중심지로 향하게 만들었다. 1970년대 초의 세계적 물가상승은 평화기로서는 전례가 없는 사례였고, 통화정책의 완화에 따른 미국 통화 공급량의 증가와 국제수지 흑자의 확대로 인한 독일 및 여타 유럽 국가와 일본의 통화 공급량 증가가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통화 공급량이 빠르게 성장한 것은 세계적 경제 호황에 기여했고, 1차 원자재 수요의 급증, 석유를 포함한 상품가격의 급등을 부채질했다. 수요 확대에 직면한 이 상품들을 생산하는 나라들의 GDP 성장률도 상승했다.

세계적인 예상 물가상승률의 증가에 대응해 투자자들은 금을 비롯한 귀금속과 희귀수집품, 부동산 등 고정자산의 매입을 늘렸다. 1970년대 초 세계의 물가상승률이 상승하는 동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은행 대출의 급증을 불러온 신용시장의 충격이 발생했다. 1970년대 기간중 이들 나라에 대한 대출은 연 30%의 속도로 증가했다.

라틴아메리카 차입자 집단의 대외채무는 매년 20%의 속도로 증가했다.

그 다음의 주된 충격은 1979년 10월 FRB의 조작절차 변경 - 소위 볼커 충격 - 으로 가속화하는 물가상승에 대한 기대를 거의 즉각적으로 꺾어 놓았다. 이 조치 전에는 FRB가 금리를 안정하면 시장의 작용을 통해 신용의 성장 속도가 결정됐는데, 새로운 조치하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신용의 성장 속도를 제한하는 일에 개입했다.

은행 대출의 성장률이 급격히 하락하자 미 달러화 유가증권의 금리가 급등했다. 투자지출이 감소했고, 세계적인 경기후퇴가 뒤따랐으며, 원유를 비롯한 상품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멕시코와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해외 자금의 차입 금리가 지렛대식으로 급등하고, 수출 물량과 수출 단가는 떨어지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됐다. 미 달러화 유가증권 금리의 급등, 그리고 이어진 원유가격의 하락은 텍사스 주와 다른 석유생산 지역에 소재한 미국 은행들의 대대적인 파산을 초래했다. 또한 곡물생산을 위주로 하는 중서부 지역의 은행들 다수가 농지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파산했다. 미국 저축기관들이 지불하는 단기예금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대부분의 저축기관들이 장기 부동산저당증서에서 벌어들이는 금리 수준보다 단기예금 금리가 높아지면서 자본금 잠식 상태에 빠져들었다.

1980년대 전반 일본 은행들에게 적용된 금융 규제완화는 본격적인 신용시장 충격이었다. 예전에 일본 은행들은 그들의 예금부채에 지불할 수 있는 금리와 대출에 부과할 수 있는 금리 모두를 제한하는 엄격한 규제 아래서 영업했다. 게다가 정부 관료들이 은행으로 하여금 전략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산업의 제조업체들에게 자금을 대출하도록 요구하는 행정적 지시의 영향도 받았다. 금융 규제완화의 한 동기는 은행 대출에 대한 산업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우대 기준을 토대로 한 차입자들간의 신용 할당이 불필요하게 됐다는 점이고, 또 다른 동기는 일본 은행들이 미국 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조건에 버금가는 도쿄의 은행시장 및 자본시장에 대한 접근이 미국 금융업체들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요구였다.

금융 규제완화를 통해 도쿄와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은행들은 일본 내 부동산 대출을 늘릴 수 있었고, 해외의 자회사와 지점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일본이 미국 국채의 매수를 중단한다면 미 재무부는 재정적자 조달 자금을 어디에서 얻을까? 라는 것이 뉴욕과 도쿄 양쪽의 이야기거리였다.

이렇게 신설된 일본 은행들의 해외 지점은 역외예금 시장에서 획득한 자금을 사용해 현지 국가에서 빠르게 대출을 확대해나갔다. 또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의 다른 경쟁자들보다 낮은 금리를 부과했다. 더욱이 일본의 투자자들은 미국의 주요 도시와 여타 선진국의 주요 금융 중심지에서 부동산 - 업무용 빌딩, 주택, 골프장, 스키 휴양지 - 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 매입 자금의 대부분은 일본 은행들의 해외 지점으로부터 차입된 자금으로 충당됐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이 성장하는 속도를 억제하기 위해 1990년 초 일본은행의 신임 총재가 취한 결정이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을 터뜨렸다.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1990년에 30%, 1991년에 25% 하락했다.

일본의 수출이 수입에 비해 급증하면서 엔화 가치가 외환시장에서 큰 폭으로 상승했다. 엔화 가치의 상승이 기업의 수익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은 중국과 태국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생산시설 투자를 늘려 주로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을 겨냥한 공급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런 투자 활동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수입된 고부가가치 부품들을 현지 공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본 은행들은 일본 제조업체들의 뒤를 쫓아 이들 나라에 대한 대출을 빠르게 확대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기업들이 멕시코에 제조공장 설립을 확대함에 따라 멕시코로 유입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증했다. 멕시코 페소화 유가증권의 고금리에 미국의 머니마켓펀드(MMF) 자금이 유인됐고, 미국의 연기금과 뮤추얼펀드들은 새로운 자산군 - 이머징 마켓 유가증권 - 에 속하는 주식과 채권의 매수를 늘렸다.

멕시코로 유입되는 해외 자금의 감소는, 이 나라가 GDP의 6%까지 늘어나버린 경상수지 적자를 더 이상 조달할 수 없게 됐음을 의미했다.

태국으로 유입되는 해외 자금 유입액이 1996년 말에 크게 둔화된 것은, 태국 은행들이 소유한 비은행 금융회사들이 소비자 대출에서 거액의 손실을 내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 비은행 금융회사는 은행 대출에 대한 규제를 피해 갈 목적으로 설립됐다.

태국은행은 1997년 초 대외준비자산이 거의 고갈되고 나자, 바트화의 외환가치를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바트화의 외환가치 하락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파급되는 전염 효과를 촉발했고, 아시아 국가들의 갑작스런 수입 위축을 초래해 이들 나라의 무역수지 적자폭이 1500억 달러나 감소했다.

이런 충격들 가운데 몇 가지는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즉 1994년 초 수개월동안 멕시코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일본의 주가와 부동산가격의 상승 속도는 너무 높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이들 자산의 가격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가격 상승의 행진이 멈추자, 붕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1994년 멕시코의 경상수지 적자도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진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충격이 없었더라도 무언가의 격발 요인이 결국에는 멕시코로 유입되는 대출 자금의 축소를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1996년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경상수지 적자 역시 지속할 수 없는 수준의 큰 규모로 불어나 있었다. 비록 그 기폭제의 성격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해도, 무언가의 뇌관이 자본 유입의 감소와 이들 통화의 외환가치 하락을 촉발했을 것이다. 일본의 부동산가격과 주가 거품, 이어서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형성된 거품은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거품은 언제나 붕괴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중반에 극도의 과대평가 상태에 도달한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하락 반전했던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국가간 자금흐름의 변화를 각국 GDP에서 무역수지 규모가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로 따져 보았을 때, 이 비율의 변동성이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훨씬 더 커졌다는 점이 1970년대 초 이후의 현격한 특징이다. 멕시코 경제가 호황 국면으로 들어서고 해외 자금이 이 나라로 유입됐을 때, 멕시코의 무역수지 적자는 GDP의 7%에 달했다. 멕시코가 금융위기를 겪는 동안 멕시코 자금과 해외 자금이 이 나라에서 빠져 나갔을 때, 무역수지 흑자는 GDP의 4%에 달했다. 이 정도의 변화는 워낙 대규모인데다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이로 야기되는 충격은 물가상승률과 멕시코 기업, 가계, 은행의 채무상환 능력뿐만 아니라, 페소화의 외환가치, 페소화 표시 유가증권의 가격, 멕시코의 실물자산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여러 나라에서 GDP 대비 무역수지 비율이 급격한 변동을 보인 것은 국가간 자금흐름의 규모와 방향이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로 유입되는 자금흐름의 증가는 해당국 통화의 외환가치와 함께 이 나라에서 거래되는 유가증권과 기타 자산의 가격을 상승시켰다. 이렇게 한 나라로 유입되는 국가간 자금흐름의 증가는 국내 신용의 성장률 상승을 동반하는 일이 자주 나타났고, 그 결과는 경제 호황이었다.

신용시장 충격과 통화적 충격 중에는 한 나라로 유입되는 자금흐름을 확대시키고 그 나라에서 투자할 수 있는 상품, 통화, 주식, 부동산의 가격 상승을 초래하는 충격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충격이 국가간 자금흐름의 역전을 촉발했고, 그 결과는 통화, 유가증권, 기타 자산의 가격 가파르게 떨어지는 금융위기였다.

이 같은 투기적 광기를 동반하는 충격들은 여러 가지 통화로 표시된 유가증권과 기타 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선호에 대폭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데 기인한다.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는 주요 교역 상대국들의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미국의 물가상승률 격차에서 산출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하락했다.

지난 30년 동안 국가간 자본흐름의 변동성이 증폭된 현상에 대한 한가지 가능한 설명은 그 이전의 시기 - 각국의 통화가치가 고정되거나 국가간 통화간의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개입이 있었던 시기 - 보다 충격이 커졌다는 점이고, 특히 통화정책의 기조의 변화를 동반하는 충격이 커졌다는 점이다.

중앙은행들은 금리와 통화 공급량의 성장 속도를 변경할 수 있었다. 통화의 평가를 유지한다는 것은 해당국의 물가상승률이 주요 교역 상대국들의 물가상승률과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화의 평가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들이 채택하는 정책은 현행 및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고, 이에 따라 국가간 자금흐름의 변화가 유발된다. 결과적으로 국가간 자금흐름의 진폭이 훨씬 더 확대된 이유는 통화정책과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가 커졌기 때문이다.

변동환율제하에서 통화적 충격은 특정국의 물가상승률에 대한 투자자들의 추정과 함께 결과적으로 매일 일정 시점의 현물 시장환율에 대한 추정에도 변화를 유발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 미국의 팽창적 통화정책으로 인해 투자자들은 미국의 물가상승률 추정치를 상향 조정했고, 미 달러화 외환가치의 추정치를 하향 조정했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해외 유가증권의 매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미 달러화 유가증권을 매도했고, 투자자들의 외국 통화 매입은 미 달러화 외환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이 독일 마르크화, 스위스 프랑화 및 여타 해외 통화를 매입한 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 하락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들 투자자 집단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달러화 이외 통화의 유가증권 비중을 늘리면, 미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확대될 수 밖에 없고, 국가별 물가상승률 격차에서 산출되는 외환가치 변동보다 빠른 속도로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하락할 수 밖에 었다.

마찬가지로 1979년 가을 미국의 통화정책이 훨씬 더 긴축적인 기조로 변경되자, 투자자들은 곧바로 미국의 물가상승률 추정치를 하향 조정했고,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에 대한 추정치는 상향 조정했다. 투자자들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를 매입함에 따라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상승했다. 이들 투자자 집단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미 달러화 유가증권의 비중을 증가시키면, 미국의 경상수지와 무역수지 적자는 늘어나야 한다. 투자자들이 미 달러화 유가증권의 매입 속도를 늘리려고 하는 한,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가 국가별 물가상승률 차이에서 산출되는 가치를 초과해 상승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투자자들이 특정 통화로 표시된 유가증권의 보유를 늘리거나 줄이고자 할 때마다, 이 통화의 외환가치에 오버슈팅이나 언더슈팅이 유발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 - 보다 정확히는 국가별 물가상승률 차이의 변화 - 는 현물 시장환율 기대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외환가치에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을 초래한다.

GDP 대비 무역수지의 변동성이 증폭된 현상에 대한 두번째의 보완적인 설명은, 변동환율제하에서 어느 한 통화로 표시되는 유가증권 수요의 확대라는 형태로 발생하는 일정한 크기의 충격이 그 나라에서 거래되는 유가증권과 부동산의 가격 상승이 유발되는 효과를 통해 해당국의 GDP에 더욱 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나라에서 투자 가능한 유가증권의 가격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수 확대에 따라 상승했다.

변동환율제하에서는 특정 통화의 유가증권에 대한 외국인들의 수요증가가 같은 크기로 발생할 경우, 해외에서 유입되는 저축액의 증가에 대응하는 규모로 이 나라의 무역수지를 변화시키는 적응 과정이 시작된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되는 저축액 증가가 -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통해 - 미치는 직접적 영향은, 자본비용의 하락을 통해 국내 투자지출이 확대되고, 가계 부의 증가에 따라 가계의 소비지출이 증가한다는 점이었다. 대다수 국가에서 소비지출이 투자지출에 비해 3~4배 더 크기 때문에, 총지출의 증가는 대부분 가계지출의 증대로 구성된다. 소비지출의 확대는 곧 가계 저축률의 하락을 의미한다.

국가간 저축흐름의 유입이 늘어나는 나라에서 국내 투자에 비해 국내 저축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이 이 같은 적응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해외 저축이 유입되는 나라와 그 공급 역할을 하는 나라 모두에서 저축과 투자 관계의 변화를 유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은 상대가격의 변화와 상대소득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대가격의 변화는 해외 저축의 유입이 늘어난 나라의 통화가치가 외환시장에서 상승하는 현상에 반영돼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해외 저축의 유입이 증가하는 나라에서 GDP 성장률의 상승을 가져왔다. 이것은 그 나라의 유가증권 및 기타 자산가격이 상승함에 따른 가계 부의 증대가 소비지출을 확대시킨 결과였다. 유가증권 및 기타 자산가격의 상승으로 일부 투자자들의 부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부에 대한 목표수준이 달성됐기 때문에 이들은 현재의 소득에서 저축하는 비중을 줄였다.

즉, GDP에서 무역수지가 차지하는 비율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된 것은, 일단 한 나라에서 유입되는 해외 저축이 증가하면 그 나라에서 투자 가능한 유가증권과 기타 자산의 수익률을 상승시키는 적응 과정의 변화가 유발됐기 때문이다. 부의 증가는 경제 호황에 기여했다. 실제로 일단 해외 저축의 유입이 늘어나 수익률이 상승하게 되면, 다시 해외 자금의 추가적인 유입을 유발하는 되먹임 효과가 발생했다. 경제 호황이 지속되고 확산됐다. 이 같은 국가간 현금흐름의 유형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많은 시장 참여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자료에 나타난 유형 가운데 하나는 한 나라로 해외 저축이 유입되면 경제 호황이 동반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1970년대 멕시코와 기타 개발도상국, 1990년대 전반기 중 멕시코, 태국 및 동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경제 호황의 지속은 왜 대여자들 - 적어도 이 들 중 다수 - 이 결국에는 조정이 일어날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국가간 저축흐름의 변동성은 신용 공급의 변동이 경기순환 파동과 동조한다는 점에서 민스키의 모델과 합치된다.

대다수 국가에서 벌어진 외환위기는 국가간 자금흐름의 역전으로 인해 발생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다수의 사례에서 자금 유입이 늘어나는 속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국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는 경우에 따라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 혹은 다른 시장에서 비이성적 과열의 출현을 지적해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가 가지는 역할은 하나 또는 여러 나라에서 지속 불가능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대외채무의 누적을 지적해야 하고, 유지 가능한 수준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조정에 뒤따를 큰 비용과 함께 불가피하게 혼란스러울 후속 파장에 대해서도 지적하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의 함의에 대한 결론은 투자자들과 다른 시장 참여자들 자신이 내리도록 맡겨질 것이다.

일국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들이 설립된 것은 반드시 개개의 금융기관들은 아니더라도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적 차원에서 이런 목적에 대응하는 궁극적 대여자의 존재 의의는, 임의의 국가로 유입되는 지속 불가능한 수준의 거대한 자금흐름을 유발하는 투기적 광기 국면이 끝날 때, 해당국 통화의 급격한 외환가치 하락을 완화하는 것이다.

광기 국면이 진행 중일 때는 지금 유입의 증가에 대응해 해당국 통화의 외환가치가 상승하게 되지만, 자본 유입이 감소하는 시점이 되면 통화의 외환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수출업자들이 통화가치의 하락에 따른 상대가격의 변화와 국제경쟁 조건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환시장에서 통화가치의 하락이 증폭되는 해당국 통화의 언더슈팅 현상은 불가피하다. 즉 수출업자들이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의 생산을 늘리고 해외 고객을 발굴해 거래 체결을 진행하는 데는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통화의 언더슈팅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국가에서 겪은 바 있는 일시적인 극심한 외환가치 폭락은 해외 통화를 기준으로 차입한 국내 기업들이 채무 원리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국내 통화 환산액의 급증으로 연결돼 이들 기업의 채무상환 능력을 위협한다. 이들 기업의 파산은 국내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들의 채무상환 능력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의 하나는 임의의 국가로 유입되는 국제적 자본흐름의 규모가 지속될 수 없는 수준의 거액에 달했다는 사실과, 자본 유입이 줄어들면 해당국 통화의 외환가치 하락이 필연적인 조정 과정으로 나타날 것임을 지적해주는 일을 들 수 있다. 해당 통화의 외환가치 하락이 발생할 때는 국제적 대여자들이 언더슈팅의 폭을 축소하기 위해 신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용 지원의 준비가 빨라질수록 전염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

IMF의 설립 동기는 국제적인 궁극적 대여자가 존재했을 경우 1920년대, 그리고 특히 1930년대 겪었던 금융 불안정에서 큰 부분을 막아냈거나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IMF 인력은 매년 두 차례 각 회원국을 방문해 해당국의 경제정책에 대해 논의한다. 그러나 IMF가 어느 회원국의 국제적 차입이 지속 불가능한 - 경상수지 적자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수준으로 지나치게 확대하는 - 양상에 접어들었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유지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경제적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값비싼 비용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연착륙 보다는 경착륙 일 가능성이 더 높다 - 는 경고를 울린 적은 거의 없다. 더욱이 붕괴가 발생한 시점에서 해당국 통화가치의 폭락과 그 폐해를 피하기 위해 신용을 공급할 능력도 없었다.